[광교신문=김병수의 제주도사나] 어느날인가는 당숙 딸 A누나가 제판장에서 고무신을 집어 던지며 욕을 해댔다며 분개하는 아버지 모습을 봤다.

광주항쟁의 여파와 함께 합법과 비합법 윤리와 비윤리의 경계가 무너지던 84,5년의 일이였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는 아버지의 욕설과 반대로, A누나가 견고해 보이던 아버지 세대에 분노하는 상상만으로도 희열을 느꼈다.

아버지는 폭력과 복수로 끔찍한 세상이 열리는 것처첨 치를 떨었고, 저녁 밥상머리에선 전쟁 후 빨갱이로 찍힌 이웃이 계속되는 폭력에 시달리며 어떻게 인생을 마감했는지 말씀하셨다.

그런 아버지 기대와 달리 나는 일종의 각오를 한 계기가 되었으니, 나로서도 어른들에게 훈계하고 싶었던게 있었을 나이였다.

그래도 막연하게나마 아버지의 괴로움이 더 컸을 거라고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생각에 머물고 공상을 즐기는 편이지만 아버지는 겉과 속이 투명하고 곧이곧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주변의 흔한 사람들이 이제 너도 뭔가 할 때라며 부추길 때도,

아버지는 정치는 사기꾼들이나 하는 짓이라거나, 출세 수단으로 정치를 기웃대는 걸 빈축하며 니가 학생운동 할 때가 정치라거나했다.

나는 학교 때나 이후 한 번 했던 출마했던 선거에 부모님과 함께 나섰다. 나에게 세상은 부모님과 같이 조심스럽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아버지는 남겨 주셨고 그럴때 아버지는 아무말 없이 흐뭇한 모습으로 내 손을 잡아 주셨다.

섬망에 젖어들 때 아버지는 화투로 딴

돈을 두 가방에 넣어 방에 뒀다며 가방을 찾는다. 누이가 손주들 줄라고 가져갔다고 하면 좋아라 하신다.

얼마전 정신이 온전한채 평온한 모습의 아버지가 그동안 살면서 큰문제 없이 아프지 않고 참 잘살았다고 말씀하셨다.

우도에서 흔히 일평생 가족을 돌보던 해녀 할망들의 모습처럼 이버지는 늘 자식과 손주에게 의무를 지고 살아왔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과 의지를 굽힐줄 몰랐고 자식과 불화하는 시간 또한 아버지의 애정에 일점의 혼란을 줄 수 없었다.

병원 면담이 오후에 잡혔고 형은 버스로 오고 있다.

전주 집 앞 동네 카페에서 아버지와의 옛 기억도 더듬고 자연스레 그 시절의 아버지를 이해해보려는 나를 만난다.

병원에 가기 전이라 그런지 내내 긴장된 상태라는 것도, 아버지 얼굴을 봐야 맘이 놓이든 할 것 같은 심정도 빗속에 번져 나간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고추밭에서 같이 땀을 흘렸다면하는 후회가 스친다. 조금은

긴장되고 얼마간은 지루했던 오전이 지난다. (23.09..16)

 

* 글 • 사진 : 김병수 우도 담수화시설 문화재생 총괄기획자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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