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신문=김병수의 제주도사나] 바라나시 최남단 아시 가트(Assi Ghat)에 들렀다. 배를 태워준 칼리 쉬란은 대를 이은 뱃사공 카스트의 일원이다.

일행과 만나기로 한 가트를 착각해 아침부터 고생한 그와 사진을 같이 찍었다. 칼리는 고용된 뱃사공이라 4:6의 6을 임대료로 내고 일 한다.

예전 한국 택시의 사납금, 화물의 지입차량 등 다양한 임대수수료 체제가 떠오른다. 지대추구는 언제라도 착취의 성격을 띄고 노동의 삶을 어렵게 한다.

아시 가트 초입의 한 책방에서 바라나시 관련 두 권의 책을 샀다. 하버드 다이에나(Diana L. Eck)교수와 / 인도 라나 PB 싱(Rana P.B Singh)교수의 책이다.

영문으로된 두 권의 책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 그림과 지도를 중심으로 살펴 봤다. 바라나시 연구로 석사 논문을 냈던 A에게 물어 보니, 라나 교수의 기초 연구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바라나시는 신을 경배하는 사람들로 늘 붂적인다. 그들을 맞이한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에겐 이곳이 일터요 삶터다.

아시 가트에서 돌을 세공하는 장인의 집을 방문했을때 그의 집에는 7형제 28명의 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세공하는 돌은 라자흐르탄이나 쉼라 등에서 온다고 한다.

카스트 제도를 현대 한국 사람들은 잘 이해 못한다. 국회에서 상가임대차보호법을 만들때 일본의 백년가게처럼 오래 점포를 운영할 기반을 만들자고 했을때의 일본이 카스트 사회를 유지한 반면,

한국은 뿌리 깊은 차별로 존재했던 조선 이후 근현대로 들어서며 명맥을 상실했다.

이어 6,70년대가 지나며 공방 및 공방형 소점포가 사라지며 장인과 장인 가계의 흐름도 사회적으로 쇠퇴했다.

집을 둘러 보면 꼭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대가족 제도의 어려움은 사람 사는 곳 어디든 피하기 어렵다.

다만 형제들이 같은 일을 하고 서로 돌보며 인간적 유대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사회란 점은 인정하게 된다.

 

바라나시를 찾는 참배객, 관광객은 꾸준히 늘고 있지만 장인들의 작품을 알아주고 이해하는 인구는 자꾸 줄어 든다고 한다.

자연 먹고 살 방편도 시장의 형편에 따라 어떻게 될지 위태로운 상황으로 보인다.

이제 바라나시의 일정이 끝나간다. 강가를 거닐며 해지는 가트에 앉아 쉬던 날도 이제 오늘이 마지막이다.

생애 언제 다시 바라나시에 올까 하다가도, 도시의 변곡점이 되었던 숱한 역사적 사건과 다른 한 편에 비교적 짧은 최근의 도시 개발로 인한 왜곡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이 좋지 못하다. 다시 찾게 된다면 이 이유로 바라나시의 비극을 지켜보게 될 것 같다.

바라나시를 입체로 다양한 생각과 배움을 배풀어 준 해남 새들의노래마을 분들께 감사 드린다. 또 건축과도시 연구자로 바라나시 논문을 썼던 A의 안내로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연구는 타자성과 주체성에 대한 경계에서 연구활동가라는 개념으로 확장 되고 있다.

A가 연구활동가로 자신의 세계관을 확장해 나가길 바라며 나 역시 지난 활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바라나시. 어제 꿈 속에서 가트에 날리던 연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꿈을 꿨다. 나를 날리던 그 아이의 얼굴이 어스름하게 기억 난다.

우리는 어떤 인연으로 세상을 만나 살아간다. 그 연이 다할때까지 살다 가야겠지… 세상은 좀 더 지속되겠지만. (23.02.11)

 

* 글 • 사진 : 김병수 우도 담수화시설 문화재생 총괄기획자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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