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신문=이헌모의 일본 이야기] 어제 아사히신문의 온라인판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있었다.

일본의 코로나 대책이 서구 국가와 비교하면 선방하고 있지만,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하면 절대 칭찬할 만한 대응이 아니라면서, 일본의 의료 시스템이 서구나 아시아 국가에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된 이유로 ‘유한한 리소스(자원)’을 적절히 분배・조정해야 하는 '정치 본래의 역할'이 결여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는 오랜 기간 정치가들이 본연의 역할을 하지 않고 있음은 물론이고, 정치에 대한 화두가 사라진 일본 사회의 '무관심' 과 '무력감'에 대한 질책과 반성으로도 읽힌다.

일상에서 정치 얘기를 하는 경우는, 십중팔구 술자리 이자카야에서 '안줏거리'로 삼아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 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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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석에서 정치를 화두로 삼아 진지한 토론을 하는 행위는 '사회적 금기' 와도 가까우며,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서슴없이 정치 화두를 꺼내는 사람은 '공기'를 읽지 못하는 사람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또한 일본 정부가 추진하려는 방역을 강화하기 위해 벌칙 규정을 두려고 하는 '특조법' 개정에 대해 우려를 나타낸다.

정치가 기본적인 정치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려고 하는 것은 본말 전도이며,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우려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짧은 기사이며, 단락적인 문장이라서 글쓴이의 정확한 의도나 취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국민 개인의 정보와 권리 중시라는 ‘인권'적 측면과 함께 미증유의 팬데믹 위기 속에 처한 공동체의 안전과 방역이라는 ‘공공선’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이 의견은 충돌할 수 있으나 이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며, 일정한 동의가 필요해 보인다.

이하 기사 번역

감염 확대의 책임, 정치 경시하는 사회에도…

코로나 사태를 맞아 벌써 일 년이 된다. 새삼 2020년에 일어난 일을 되돌아보았다.

당초, 일본 사회는 ‘새로운 리스크’에 매우 긴장했다. 바다 건너에서 나쁜 것이 들어왔을 때, 이곳 섬나라 사람들은 흔히 최고의 경계심과 함께 이를 맞이한다.

그런데 감염자 수가 서구에 비해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낙관적인 무드가 퍼지게 된다. 일본인에게는 감염이 확대되기 어려운 미지의 원인 「팩터ー X」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논의도 있었다.

그러나 현상은 무엇과 무엇을 비교하는가에 따라 그 해답도 크게 달라진다. 확실히 서구에 비하면 일본은 잘해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아시아의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결코 칭찬받을만한 내용이 아니다.

공표된 수자를 보는 한, 중국이나 베트남의 감염자 수가 매우 적지만, 일본과는 사회체제가 다르므로 단순 비교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웃 나라인 한국과 비교하여도 결코 상황은 좋지 않다. 20일 오후까지 일본의 누계 사망자 수는 4680명인데, 인구가 약 절반 정도인 한국에서는 1300명으로 실질적으로 일본이 많다. 한국에서는 올겨울 신규 확진자 수도 이미 지난달 하순부터 감소 경향에 있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곳은 대만으로, 지금까지 누계 사망자 수는 한자리이며, 확진자 수도 전체 천 명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도쿄 만이 매일 천 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오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피아의 차이에 깜짝 놀라게 된다.

서구하고는 포옹이나 악수와 같은 생활 습관이 다른 점이나, 공공 공간에서의 회화 방법, 마스크에 대한 생각 등 많은 차이가 있다. 자연환경도 다르다.

한편, 한국이나 대만 등은 공통점도 많다. 이웃 국가와 비교하면, 오히려 일본이 ‘혼자 패배’하고 있으며, 올겨울 더욱 사태가 악화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그런데 최대의 문제는 역시 ‘정치’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매우 본질적인 의미에 있어서이다.

무릇 사회에는 다양한 자원이 편재해 있다. 이들을 남는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우선 ‘시장’이라는 시스템이 있다.

그러나 당연히 시장에만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재화・서비스, 또한 원래 시장에서는 대응하기 어려운 타입의 일들도 있다. 에너지 공급이나 치안・국방 등은 정치가 유지・조정하게 된다.

두말할 필요 없이, 현재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그와 같은 정치적 조정이 필요한 공중 위생상의 ‘위기’다. 예를 들면, 이 나라의 병상 수는 세계에서도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도 입원도 하지 못한 채, 자택에서 죽어가는 환자가 나타나고 있다.

‘병상이 있어도 스태프가 부족하다’는 설명을 자주 듣게 되는데, 일본의 간호사 취업자 수는 2018년 말에 약 120만 명, 사회의 고령화에 수반하여 최근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치이며, 예를 들어 인구당 수는 한국의 2배 이상 된다. 의사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미국, 한국, 캐나다 등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이는 결국 ‘숫자’가 아니라, ‘자원 배분’의 문제이다.

일 년 전, 우한에서 급거 강행공사로 거대한 코로나 전용 병원이 만들어진 것이 일본에서도 반복하여 보도되었다. 중국은 필요한 것을 정치가 풀어간다,는 의지가 강한 것일 거다.

물론 같은 ‘의지’가 홍콩 민주주의를 지금 위기 상황에 빠트리고 있어, 우리는 그런 수법을 무조건 칭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정치가 정치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면 사회 전체는 큰 손해를 입게 된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평시에는 잊고 지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원래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형태로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

어느샌가 우리들은 정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무릇 정치가가 되는 것이 어린이의 장래 꿈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대화 중에 ‘정치적’이라고 말을 하면, 뭔가 얍삽한 것, 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지기조차 한다.

한편, ‘경제적’ 이란 말이, 그 자체가 뭔가 플러스 가치를 띠고 있는 것과도 대조적이다. 물론 이렇게 된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정치를 담당해 온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 사회를 배신해 온 탓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걸 방치하여 온 이 사회의 즉, 정치라는 활동 자체를 경시하며, 지금의 리더가 무능하면 자신들이 후보자를 찾지 않고, 오직 술자리 안주로만 삼아 정치가를 비아냥거리는 습관이 들어버린, 이 사회의 많은 멤버의 책임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신뢰를 잃은 정부가 긴급사태 선언을 발령해도, 사회적인 공기는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 전체가 코로나를 ‘얕잡아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큰 허무감이, 나날이 증가하는 환자를 보면서도,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관망이나 하게 되는 자세를 취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해 지금, 정치는 공중위생적인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벌칙을 강화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자원 배분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역효과일 것이다.

무릇 ‘처벌’에 호소하는 것은 가난한 나라의 방식이다. 일본은 쇠퇴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세계적으로 본다면, 아직 풍요로운 나라이다. 북풍이 아니라 태양으로 자원을 최적화하는 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들은 지난여름에 좀 더 이런 사태에 대한 논의를 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나 자신도 반성하고 있다.

가미사토 다츠히로(神里達博) 1967年生まれ。千葉大学大学院教授。本社客員論説委員。専門は科学史、科学技術社会論。著書に「リスクの正体」など

https://digital.asahi.com/art.../ASP1R435JP1PUPQJ005.html...

덧) 이 글은 일 년 전인 2021년 1월 24일의 기록이다.그 후의 일본 사회는 코로나 대책에 있어 변화가 있었는가?

이번 오미크론 변종에 의한 급속한 확산이 있기 전까지 일본은 코로나 청정 국가로, 본문 속에서도 언급한 일본만의 특유한 청결 문화니, 유전자니 하는 선무당 사람 잡는 소리가 적지 않았다.

반성보다는 현실에 안주했던 것이 아니던가.

 

* 글 • 사진 :  이헌모 일본 중앙학원대학(中央学院大学) 법학부 교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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