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신문=이헌모의 일본 이야기] 기온차가 심한 요즘이다. 한낮에는 초여름의 더위지만 조석으론 쌀쌀하다. 도쿄를 비롯한 관동지방은 어제부터 장마에 접어들었다 한다. 이제 한동안 비가 이어지면서 습도가 매우 높은 나날이 이어질 것이다.

비가 내리면 시원한 느낌이 들어야 하지만, 오히려 높은 습도에 몸은 끈적끈적 불쾌지수만 높아지는 계절이 도쿄의 장마철이다. 그렇다고 전철이나 강의실 냉방이 빵빵해서 시원하기보다는 이마에 맺힌 땀이나 식혀주는 정도에 만족해야 한다.

아침 새벽 눈을 뜨니 비가 치적 치적 내린다. 기온은 약간 쌀쌀한 느낌이지만 꽤 습하다. 비를 보고 있자니 벌써 한 달이나 지난 일이 문득 떠오른다.

발목 부상을 당해 깁스를 하고 절대 안정을 취해야 했던 지난 5월 초. 한국에서 고향 포천 후배 두 부부 네 명이 연휴를 이용해 4박 5일 일정으로 도쿄에 놀러 왔다.

하코네 아시호수에서
하코네 아시호수에서

 

그중 1박을 후지산과 하코네 관광지를 돌아보고자 후지산 전망이 좋은 가와구치(河口湖)호숫가의 여관 호텔을 미리 예약했다. 1박 2식에 일인 당 세금 포함 19,000엔.

이 나라는 호텔은 룸 차지가 아니라 사람 머릿수 대로 계산해야 하는 인두세 같은 시스템이다. 또한 고속도로 비용도 만만치 않은 게 일본의 현실. 그런 의미에서 미쿡에서는 호텔은 룸 차지이고 고속도로는 대부분 프리웨이라서 우리 집 6식구가 여행을 다녀도 경비는 일본보다 훨씬 부담이 적었다.

아무튼 예약을 한 호텔은 가와구치 호수를 가운데 두고 후지산을 마주 보는 전망이 좋은 곳이었고, 후지산 쪽 벽면이 통유리로 되어 다다미방에서 뒹굴뒹굴하며 후지산을 감상하다 온천도 즐기고 저녁은 카이세키(懐石) 요리를 맛보며 일본 료칸 호텔의 정취를 듬뿍 느껴볼 수 있는 곳이었다.

바로 이곳이 코센소
바로 이곳이 코센소

 

그런데 후배들이 체제한 4박 5일 중, 날씨는 청명했는데, 하필이면 도쿄를 떠나 후지산을 향하는 순간부터 1박을 하고 하코네 관광을 마치고 도쿄에 돌아올 때까지 줄곧 비가 내렸다. 얄궂은 날짜 선택이었다. 일본에서 말하는 '비를 몰고 다니는 남자' 인 아메오(雨男)가 후배 둘 중 누군가 있었음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난 절대 아니다.

일본의 최고봉(3,776미터)인 후지산 주변에는 화산 폭발로 생성된 다섯 호수가 있다. 이름하여 후지 5호(富士5湖) 즉 가와구치호(河口湖), 야마나카호(山中湖), 모토스호(本栖湖), 쇼지호(精進湖),사이호(西湖).

이 다섯 호수를 돌며 후지산을 보면 각각 호수에 반영된 후지산은 계절마다 색다른 맛과 멋을 제공해 준다. 그중에서도 모토스호에서 찍는 사진을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도쿄 출발부터 비가 내렸는데 후지산 가까이에 도착해도 전혀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일설에 의하면 후지산은 여성성이라 멋진 남자가 나타나면 부끄러워 모습을 감춘다고 하는데, 이는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다.

 

비가 안 오면 이런 풍경
비가 안 오면 이런 풍경
모토스호에서 바라보는 후지산
모토스호에서 바라보는 후지산

 

일본 여성이 멋진 남자 나타나면 부끄러워하던가? 아니올시다. 오히려 요즘은 남자를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들 것이기 때문이다(오해는 없기 바람. 요즘 일본 남들은 초식남이라 불릴 정도로 남성성이 퇴보하고 있음)

도쿄를 출발하여 약 두 시간 정도에 모토스호에 도착했는데 하루 종일 비만 내리고 빗줄기도 금방 그칠 기세도 아니었다. 마침 점심시간을 지난지라 근처의 맛집을 찾아보니 평가가 좋은 곳이 있어 주차를 하고 들어갔다. 모토스호 입구 오른쪽에 위치한 코센소(湖仙荘)라는 식당이다.

1층은 오미야게(기념품 등) 코너였고 2층이 식당이었다. 나는 발목을 다친지 며칠 지나지 않은 때라서 운전은 그런대로 가능했지만, 깁스를 한 상태에서 양쪽의 목발을 사용하는 상태였다.

6명이 자리를 잡으니 한 80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얼굴이 희고 가여린 몸매의 전형적인 일본 할머니가 상냥한 미소와 함께 맞아준다. 각자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자니, 오렌지를 하나씩 서비스라며 건네준다.

일본에서 30년 이상을 살고 있지만 식당에서 오차와 물수건 외에 서비스를 받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의외였지만, 오렌지를 애피타이저 삼아 맛있게 먹었다.

서비스 한라봉?
서비스 한라봉?
대장은 산채 소바 950 엔하코네 마치에서는 같은 산채 소바라도가격이 1,500 엔이나 하더라는...
대장은 산채 소바 950 엔하코네 마치에서는 같은 산채 소바라도가격이 1,500 엔이나 하더라는...
나는 호토우
나는 호토우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 맛도 좋고 가격도 정직하니 가성비 짱이다. 또한 후배 한 부부는 둘 다 소식가라서 한 사람분 정식 세트만 시켰는데, 싫은 내색도 전혀 없이 나눠먹을 수 있는 접시와 용기를 부탁하지 않아도 미리 친절하게 제공해 준다.

난 이 지역 향토요리라고 하는 호우토(ほうとう)를 시켜 시치미(七味)라는 양념을 쏟아붓고 얼큰한 국물을 즐기면서 맛점했다. 여기에 반주로 맥주 한 잔 들이켜면 금상첨화지만, 부상 중에다가 운전까지 해야 하기에 가까스로 참았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며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하니 "고맙습니다"라며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또한 내가 목발을 짚고 있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2층 엘리베이터를 안내하며 따라나선다.

가게와 주차장 사이에 도로가 있어 차를 피해 건너가야 하는데, 목발을 짚은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밖에까지 따라나와 차가 오는지 살펴봐주신다. 마치 고향의 노모가 환갑이 다 된 자식 떠나보내는 풍경같이 느껴졌다.

우리 일행이 주차장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담배도 한 대 피우고(사실 나만 흡연자 ㅋㅋ)나서 차를 돌려 다음 행선지로 향할 때까지 식당 할머니는 우산을 쓰고 줄곧 서있다가, 떠나가는 우리를 향해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어준다.

마침 한 후배가 모친상을 겪은지 얼마 되지 않는지라, 이런 다정한 식당 할머니의 대응에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떠오른다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치미가 부족한 듯하여 다시 더 쏟아붓고 먹음 ㅎ
시치미가 부족한 듯하여 다시 더 쏟아붓고 먹음 ㅎ

 

생각해 보면, 특별한 것 없는 단순한 행위인데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말로는 전달이 안 되지만, 관광지라서 어쩌다 스쳐 지나가는 손님일 텐데, 처음부터 끝까지 따듯하게 맞고 보내주는 그 일련의 대응이 비로 흠뻑 젖은 마음을 따듯하고 훈훈하게 데워주었다.

일본인의 친절에 대해서 '다테마에' 라느니 '가식적'이라느니 하는 비판도 있다. 나 역시 영혼 없는 '스미마셍' 이나 '아리가토' 를 남발하며 지내고 있기에 그런 비판에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비록 가식적, 형식적이라고는 해도 '친절' 한 언행은 타자를 안심시키고 평안하게 해주는 건 틀림 없다. 아마도 한국에서 말하는 '정' 하고는 다른 느낌이고 개념이겠지만, 일본 사회의 습관화되고 일상화된 친절은 디폴트이며, 이는 인간관계를 접목시키는 윤활유 역할도 한다.

덧) 후지 5호 중, 모토스호(本栖湖)에 갈 기회가 있으신 분은 모토스호 입구에 자리 잡은 코센소(湖仙荘)라는 식당에서 꼭 식사를 하시길 바란다. 맛도 가격도 정직하고 거기에 친절은 덤으로 따라온다. (23.06.9)

 

* 글 • 사진 : 이헌모 일본 중앙학원대학(中央学院大学) 법학부 교수 페이스북

저작권자 © 광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