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신문=이헌모의 일본 이야기] 행정이나 학교 등 일본의 많은 시스템은, 「일본인 밖에 없다는 전제」 로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

일본인한테만 적응되는 다양성?

 

9월 5일, 「친구 딸의 머리카락. 흑인 하프입니다. 다니는 중학교에서는, 세 갈래머리 땋기가 금지되고 있다」 라고 「블랙 교칙」 에 대한 트윗이 화제가 되어, 5.7만의 ‘좋아요’를 받았다.

투고를 한 것은, 기타큐슈 시립 대학 준교수 안·크레시니씨. 재일 21년의 미국인이다.

 

일본어를 연구하고 일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안 씨이지만, 일본에서 오랫동안 사는 동안 외국인으로서의 부자유함과 떨떠름함을 느끼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한다.

다양성이 강조되는 가운데 정말로 일본은 다양화가 진행되고 있는가? 트위터에 블랙 교칙의 문제와 함께 안 씨가 기고해 주었다.

● 「일본인」 밖에 시야에 없는 시스템

몇 년 전의 이야기다. 확정신고를 위해 세무서에 갔다. 데이터를 입력하려고 하는데 오류가 나서 근처에 있는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아, 당신의 이름은 너무 길기 때문에 입력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심코 웃고 말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돼? 그럼 이름을 입력할 수 없다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라는 말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스태프와 둘이서 다양한 방법을 생각한 끝에 드디어 기계를 납득시킬 수 있어 무사히 신고가 끝났다.

개운치는 않았지만, 「뭐, 일본이니까 어쩔 수 없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여 한동안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일본에 와서 21년이 지났다. 주위 사람이 받아들여주고, 지금까지 한 번도 심한 차별을 당한 적이 없다. 물론, 많은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가이진(외국인)” 이다!」 라든가 「젓가락을 잘 쓴다」 같은 것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들었지만, 상대가 나쁜 뜻이 없기 때문에, 21년간 이런 말들을 흘려듣고 지냈다.

친구에게 이런 불만을 얘기하면 "뭐, 섬나라니까 어쩔 수 없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쁜 맘은 없어」

「섬나라니까」

지겨울 정도로 이 두 대사를 듣게 된다. 하지만 최근, 아니 21세기이니까, 둘 다 좋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쁜 뜻이 없어도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코멘트나 행동에 의해 사람을 크게 상처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일본에는 약 290만 명의 외국 국적의 주민이 살고 있다 .

확실히 옛날에는 외국인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러한 사람은 극히 적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행정이나 학교 등 일본의 시스템은 '순수 일본인' 밖에 없다는 전제로 움직이고 있다.

세무서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이 현실이 분명하게 보인다. 물론 세무서 직원이 나를 괴롭힐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세무서 직원도 매우 곤란해하고 전혀 나쁜 맘이 없었으며, 데이터 입력 기계를 만든 사람에게도 나쁜 뜻은 없었을 것이다.

의도적인 차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일본인 이외의 사람은 확정 신고하는 것을 전혀 상정하고 있지 않다」. 즉 외국인의 존재 인식이 희박한 것이다

● 일본어를 말하고 확실한 직업이 있어도 만들 수 없었던 카드

이런 에피소드는 자주 일본 사회에서 볼 수 있다. 오랫동안 일본에 살고 있는 외국인의 대부분은 반드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우선 먼저 부딪히는 벽은 이름을 쓰는 법이다. 일본에서 외국인의 이름을 쓰는 방법은 통일되지 않았다.

일단 재류카드와 운전면허 허가 링크되어 있어 여권 이름대로 쓰여 있지만 은행 통장, 광열비 청구서, 자동차보험, 건강보험증, 신용카드 등의 이름은 엉망이다. 내 지갑 안을 보면, 다양한 증명서나 카드의 이름이 다른 순서와 알파벳으로 쓰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앤 크레시니

크레시니 앤

Crescini Anne Marie

Anne Marie Crescini

Annemarie Crescini

왜 곤란한가 하면, 통장과 이름이 다른 것만으로도 신청이나 등록의 단계에서 거절된다. 나는 일본 대학에서 준교수라는 직함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신용카드 신청은 이런 이유로 여러 번 거절당했다.

이것도 분명한 '차별'은 아니지만, '일본인 밖에 없다'라는 암묵적인 전제로 사회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많은 외국인들에게 살기 어려운 사회가 되고 있다.

일본인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외국인에게는 쉽지 않다 . 나는 일본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 곤란한 것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8번 정도 라쿠텐 카드의 신청을 다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허용되지 않는 교칙

일본인 밖에 없는 전제로 움직이고 있는 '교칙'도 많이 있다. 요전 날, 내가 교칙의 문제에 대해 Twitter에 투고했더니, 상상 이상으로 확산되어, 여러 미디어로부터 취재 의뢰가 왔다.

트윗 한 내용은 친구 딸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흑인의 하프로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세 갈래머리 딴 것이 교칙 위반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학생 수첩에 세 갈래머리는 안된다고 쓰여있지 않았지만, 몇 명의 선생님에 둘러싸여 그런 말을 들은 것이다. 우선 학교 교사는 "나는 당신을 잘 모른다. 당신의 머리카락을 모른다. 그래서 알고 싶다. 이 머리카락은 세 갈래로 따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까”라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이 선생님은 딸을 이해하려고 하고 있다"라고 엄마는 처음에는 느꼈다고 하지만 결국 세 갈래로 땋은 머리는 교칙 위반이니까 안 된다는 결론이 됐다.

그 후 엄마는 “이 세 갈래머리는 멋부릴 목적이 아니다. 건강한 머리카락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다”라고 학교에 설명하자 “두 갈래로 머리 땋기 허가”가 나왔다.

여기까지의 이야기에서「왜 세 갈래머리 땋기에 그렇게까지 집착하는가?」 「두 갈래머리 땋기라도 허가가 났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니냐?」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흑인의 머리카락은 일본인과는 크게 다르다. 두 갈래의 머리 땋기로는 머리카락이나 두피가 많이 손상되어 버린다. 머리카락이나 두피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면 8개 이상의 세 갈래 따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좀 더 흑인의 머리카락에 대해 설명한다. 강하게 컬 한 머리카락과 두피는 건조하기 쉽고, 주 1회밖에 머리카락을 감을 수 없다. 너무 씻으면 머리카락이 아프고 두피가 말라서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세발하는 날을 'wash day'라고 부르며 언제 씻을지 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머리를 씻은 후, 젖은 채로 세 갈래로 딴다고 한다.

마른 후에는 퍼져 세 갈래로 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두 갈래로 땋은 머리라면, 한 갈래의 양이 너무 많기 때문에 머리가 좀처럼 마르지 않고 브러싱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냄새가 난다. 그런 일이 있기에 8~10개 정도의 세 갈래 따기로 하는 쪽이 건강한 머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엄마도 딸도 잠시 동안 두 갈래 땋기로 참았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너무 상해버렸기에 다시 한번 학교에 상담하러 갔다.

그 결과 "주에 1회(세발의 다음날)만 4개의 ​​세 갈래 땋기를 해도 좋다"라는 허가가 나왔다.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 누군가가 적당히 결정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 '악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기에 거북하고 불편하다

이 건에 관해서 학교는 나쁜 뜻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교의 입장에서 보면 차별을 하고 있다고는 손톱의 때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순수 일본인'과 똑같이 취급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의도적인 악의가 있는 차별은 물론 있다. 이런 건 어떤 나라라도 있으므로 일본이 특별히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악의가 없다' '의도적이지 않다'라는 차별은 일본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

이번 친구 딸의 교칙 사건을 보면, 앞에서 말한 내가 세무서나 카드 신청에서 느낀 불편과 같다. 어떤 전제로 사회가 움직이고 있다. “일본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머리카락의 질과 케어는 모두 똑같다"라는 것이다.

「순 일본인」의 머리카락질 이외의 아이가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하는 전제가 전혀 없다.

내가 일본에 와서 25년 동안 일본은 확실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일본인과 같은 주민표로 되었고 비자 제도도 개선됐다. 그리고 '쉬운 일본어'라는 사회운동 덕분에 일본에 있는 외국인의 일상생활이 조금 편해졌다.

그러나 올림픽에서 보이는 다양한 차별 문제나 그 후 보도된 나고야 입관 수용 시설에서 사망한 위슈마 샌다마리 씨의 사건을 보면 아직 다양성과 인권침해에 대한 의식이 얇은 사회라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오랫동안 일본을 사랑하고 일본의 국적을 취득하려고 하고 있다. 일본에 대한 애정은 매우 깊다. 그렇지만 분명 이 기사를 읽은 분들 중에는 「불만이면 모국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왜 외국인에게 맞출 필요가 있는가?」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일본이 모국인 미국 같은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국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일본의 독특한 문화와 국민성이 있기 때문에 일본이라는 나라는 나에게 매력적인 나라다.

하지만 다양성은 아직 거기까지 매력적인 상태가 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많은 외국인들은 다양한 매력이 넘치는 일본 문화가 보이지 않고, 고통받는 일상밖에 보이지 않는다.

매일매일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현실을 느껴는 것이다. 분명 많은 마이너리티가 같은 벽에 부딪치고 있을 것이다.

즉 「전형적인 순 일본인」이외의 사람에게 있어서 현대 일본 사회는 살기 어려운 곳이 되어 있다 . 나처럼 몇 번을 해도 영원히 라쿠텐 카드를 신청할 수 없는 외국인은 반드시 무척 많다.

그리고 친구의 딸처럼 교칙에 걸리는 외국 출신 아이도 적지 않다. 이름과 외형은 인간의 정체성이다. 그것을 인정해 주지 않는 사회는 아이덴티티가 거부되고 있는 것과 같다.

● "모두 다른 것이 좋아!" 라는 알고 있지만

그럼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일본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일본 사회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젠더 문제와 LGBT 권리도 조금씩 인정받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후쿠오카 현의 공립 고등학교에서는 여학생이 제복으로 바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소식 들었을 때 일본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같은 후쿠오카 현에서 제 친구 딸은 세 갈래머리 땋기를 할 수 없는 블랙 교칙에 의해 정체성이 거부되고 있다.

다양성과 다이버시티는 SDGs 덕분에 화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 '다양성'이라는 말의 의미를 아직 모르는 것 같다.

물론 LGBT와 젠더는 다양성의 소중한 부분이지만, 그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본에 사는 사람, 모두가 살기 쉬운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나는 다섯 단계를 생각했다.

1. 현재 상태를 안다

2. 의식을 높인다

3. 지식을 늘린다

4. 이해하려고 한다

5. 차이를 인정한다. 오히려 칭찬한다.

위의 5개 항목에서 앞서 소개한 친구 딸의 세 갈래머리 땋기 문제를 보자.

우선 그녀가 일본 학교의 교칙으로 곤란해하고 있는 것을 깨닫는 것. 많은 사람은 자신과 관계없는 것에 의식이 향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곤란해하고 있는 것을 깨달아 의식이 향하게 되면, 무관심한 채로는 있을 수 없게 된다 . 이 경우뿐만 아니라 이런 아이들은 일본에 많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일게 된다.

그런 다음 지식을 늘린다. 흑인의 머리카락의 질이나 케어는 어떤 느낌일까? 일본인과 어떻게 다른가. 다양한 기사를 읽거나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얼마나 곤란한지 이해하려고 한다 . 그것뿐만 아니라 그녀의 루트에 관심을 가지는 곳까지 생각이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의 질과 관리 방법을 인정한다. 당신의 머리카락은 많은 일본인과 다르다. 그래도 괜찮아 아니 멋있다! 무척 매력적인 머리카락이다.

이런 교칙이 있지만, 당신은 머리카락에 가장 좋은 세 갈래 땋기를 해도 좋다. 그리고 급우들에게도 머리카락에 대해 가르쳐줘라!

이런 과정을 밟으면 모든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있으면 일본은 곧 누구나 살기 쉬운 사회가 될 거라 생각한다. 규칙은 있어도 좋지만, 유연성과 이해는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초등학생도 포함해 많은 일본인들이 가네코 미스즈의 이 멋진 시를 알고 있다.

「모두 다르니까 모두 좋다! 」

굉장히 멋진 말인데 지금의 일본은 그런 사회가 되어 있지 않다 . 모두 다르니까 모두 좋다고 말하면서, 모난 돌을 마구 두드리고 있다.

모난 돌도 그렇지 않은 돌도, 일본인도, 외국인도, 장애인도, 건강한 사람도, 모든 사람이 자신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안 크레시니( ANNE CRESCINI, 미국 버지니아 출신 기타큐슈 시립대학 준교수)

 

원문 : 일본 사회의 다양성은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가?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 글 • 사진 :  이헌모 일본 중앙학원대학(中央学院大学) 법학부 교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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