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의 시와 삶 (24)

최상현
최상현

[광교신문 칼럼=최상현]

부부 / 함민복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521일은 부부의 날이다. 근로자의 날,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이 들어 있는 가정의 달 5, 둘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21일을 부부의 날로 정했다. 부부의 날은 1995년 민간단체인 부부의 날 위원회'건강한 부부와 행복한 가정은 밝고 희망찬 사회를 만드는 디딤돌'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관련 행사를 개최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200752<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부부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우리의 지난 문화 속에서는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여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는 남자들의 혈통이 중요하게 여겨진 반면 부부관계에 대해서는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유교 윤리의 기초인 삼강오륜에서도 부자 관계가 부부 관계보다 먼저 나온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바뀌고 사람들의 의식이 크게 변하여 이제는 가정의 기초는 부부 관계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다.

 

부부는 참으로 신비한 관계이다. 구약성경 창세기를 비롯한 여러 문화권의 전통과 설화 속에서 부부의 모습을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완전한 남남인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게 되는 계기나 과정은 모든 경우가 서로 다르지만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신비이다. 일반적으로 부부는 청춘남녀의 만남과 애정에서 출발하여 둘이 하나가 되어 한 집에서 함께 사는 관계로 이루어진다.

 

양광모의 <우산>이란 시에서는 연인이란 / 비오는 날 우산 속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 부부란 / 비오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연인 관계의 남녀와 부부가 된 이후의 관계 속에서의 남녀의 모습은 달라지는 면들이 많지만, 대부분의 정상적인 부부는 살아가면서 희로애락을 함께 겪고 누리면서 인연의 끈을 견고하게 다지고 그 바탕 위에서 자녀를 낳아 기르고 대를 이어 가고 인류 역사를 발전시키게 된다.

 

부부 또는 아내를 주제로 하는 시가 많고 남편을 노래하는 시도 있다. 수많은 시들 중에서 부부의 날 함께 읽고 싶은 시들을 소개한다. 서두에 소개한 함민복 님의 <부부>라는 시는 요즈음의 생활 문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부부는 서로 마음을 맞추고 보조를 맞추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가장 아름답게 비유한 탁월한 시이다. 한용운 님의 시 <사랑하는 까닭>은 참된 사랑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좋은 시이다. 류지남 님의 <부부에 대하여>와 문정희 님의 <부부>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담담하지만 깊어가는 부부 관계를 노래하고 있다. 이재무 님은 <또 그렇게 봄날은 간다>에서 중년 부부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부부 사이의 다툼과 화해 모습을 재미있게 노래하고 있다.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부부에 대하여 / 류지남

 

누가 누군가에게 물이 들었다는 말은

몸에서 몸으로 물이 건너갔다는 뜻이다

 

피야, 부모에게서 저절로 흐른다지만

물은, 쉬이 사람을 건너지 못하거니

 

한 우물에서 나온 물 오래 나눠 먹고

뿌리와 뿌리 맞대고 삶 부비다 보면

 

어느덧 서로의 살 속으로 물이 스며

저녁노을처럼 함께 붉어져 가느니

 

오랫동안 더불어 밥물 맞추는 동안

서로의 목숨처럼 가까워진 사람이여

 

마침내,

손때 묻은 거울처럼 물든 사람이여

 

부부 / 문정희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 꽃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 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그런 사이이다

 

부부란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또 그렇게 봄날은 간다 / 이재무

 

아내한테 꾸중 듣고

집 나와 하릴없이 공원 배회하다가

벤치에 앉아 울리지 않는 핸드폰 폴더

괜스레 열었다 닫고

울타리 따라 환하게 핀 꽃들 바라보다가

꽃 속에서 작년 재작년 죽은 이들

웃음소리 불쑥 들려와 깜짝 놀랐다가

흘러간 옛 노래 입 속으로만

흥얼, 흥얼거리다가 떠나간 애인들

어디서 무얼 지지고 볶으며 사나

추억의 페이지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스레 핸드폰 자지러진다

아니, 싸게 들어와 밥 안 먹고 뭐해요?”

아내의 울화 어지간히 풀린 모양이다

 

 

■ 프로필

- 1979 공주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 1983년부터 36년간 고등학교 영어교사, 장학사, 교감, 교장을 역임하고 대전관저고등학교에서 퇴임

- 시 읽기, 시 낭송, 시 상담에 큰 관심을 갖고, SNS를 통한 시 나눔에 힘쓰고 있는 등단 시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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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칼럼은 신문사의 논지와 견해에 있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