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올해는 창작미협이 6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한 그룹이 이토록 오랜 세월을 견디며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경이롭기도 하다. 창작미협이 그동안 지내온 과정은 고스란히 한국 현대미술의 궤적과 일치한다. 이는 우선 한국 현대미술의 시원을 대략 1950년대 중후반으로 설정하는데 따른 것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이후 비로소 화단이 안정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 해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그 역사가 이 그룹의 역사와 겹쳐진다. 일제강점기로부터 벗어나 민족미술과 일제 청산의 과제를 내걸다 돌연 한국전쟁을 겪어 모든 게 다 풍비박산이 난 후 얼추 전쟁의 상흔이 가시고 비로소 미술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1950년대 중반 이후이고 바로 그 시점에 이 그룹이 태동되었다.

“일제 식민지하에 유럽 미술의 간접적인 이식 미술의 영향에서 벗어나 나름대로의 우리 풍토 속에서 성장발전 할 수 있는 창작이념을 굳히고, 기성화단의 고질적인 보수성향에서 둔주하려는 일념” 으로 1957년에 창작미술협회(이하 창작미협)를 창립하였다고 이준(2006)은 회고 한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한미술계는 ‘자유’ 와 ‘순수’ 가 문화예술의 성격을 규정하는 수사로 기능했다. 분단 상황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미술은 그러한 것이 아니면 안 되었을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20세기 중반은 이른바 냉전체제로서 이는 문화예술분야에서도 체제 간 경쟁을 벌여왔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추상표현주의는 1950년대 냉전체제하에 각기 자신들의 체제를 대표하는 미술양식이 되어 대립되었다. 미국을 위시로 한 자유주의진영은 공산주의진영과 달리 구상형식에 정치적 내용을 담고 있는 미술을 극도로 폄하하고 외면하는 대신 한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고 믿는 추상형식의 그림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이에 서구자유주의진영의 영향권아래 놓인 모든 나라들의 미술은 추상미술로 급속히 재편되는 일련의 과정을 겪어나갔다고 본다. 당연히 한국의 상황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여러 상황은 창작미협이 태동된 배경으로 자리했다.

1957년은 “당시 한국 화단의 양대 세력인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가 국전을 중심으로 그 반목과 대립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 (하영식, 2006) 였고 따라서 화단의 세력권에서 이탈하여 오직 창작에만 전념하고자 한 것이 창작미협의 결성동기라고 밝히고 있다. 1949년 국전의 창설은 당시 이승만 체제 하에서 미술권력의 헤게모니를 우익진영에게 심어주려는 의도에서 탄생했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조선미술전람회의 틀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당연히 권력적인 욕망과 정치적인 의도가 잠복되어 있었다. 기성세대의 권력과 보수적 화단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가’ 에서 ‘가출’ 한 이들이 만든 그룹이 창작미협이었음은 앞서 이준의 글에서 밝힌 바 있다. 드디어 이들은 부모 세대, 기성세대를 거부하고 집을 나와 고아가 되었다. 그래야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가 있었다. 새로운 것을 하기위해서는 기존의 틀이 아닌 새로운 틀이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그 틀을 스스로 만들었으니 그것이 창작미협이란 그룹이었다. 특정한 이념은 부재하지만 몇 가지 다소 막연한 생각을 공유하면서 출발했는데 그것이 바로 ‘표현의 자유’ , ‘순수한 창작의지’ 다.

당시 창립구성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봉상, 류경채, 고화흠, 황유엽, 장리석, 이준, 박항섭, 박창돈> 이들의 그림은 이른바 비구상회화였다. 사실주의에서 벗어난 그림들이고 새성적인 화풍을 통해 구체적 대상의 재현에서 벗어난 그림, 혹은 대상을 왜곡, 굴절시킨 그림들이었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이루어진 미군의 진주로 인해 수용된 미국문화는 오늘날까지 우리 문화형성에 매우 지속적이고 전면적인 영향을 끼쳤다. 근대화의 등식처럼 인식된 서구화는 사실 미국화의 경향이 짙다. 해방은 주체성을 요구했다. 당연히 해방 국가의 건설과 민족의 현실이 주요 주제로 떠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계에서는 여전히 식민지시기에 형성된 서구 부르주아 미학을 전거로 한 아름다운 여인, 정물, 풍경 등이 일반적인 소재와 주제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후 한국전쟁은 분단을 초래했다. 전쟁을 통해 확실히 갈라진 남북이라는 상황은 통합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했으며 남한에서는 사회주의나 리얼리즘 등의 용어는 떠올릴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이러한 불구의 상황은 미술 또한 편파적인 쪽으로만 가능하게 했다.

관전(국전)의 보수적인 아카데미즘이 지배적인 당시 미술계에 미군의 주둔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서구문화의 영향이 드리워진 시기는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이때 이루어진 미술 경향을 우리는 앵포르멜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전후 서유럽에서 비정형회화를 일컫는 이름이었다.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 기계문명이 발달해가는 사회의 표현이 기하학적 추상이었다면 2차 대전을 치르고 난 서구에서는 더는 이성의 존재를 무조건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일련의 정신적인 움직임이 태동하게 되었고 그런 사회에 대한 혼란과 감성의 표현이 앵포르멜로 드러났던 것이다. 전쟁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즈음 국전에 대한 반발이 표면화되었다. 반국전 움직임은 제도 자체와 그 제도를 온존시키는 사람들에 대한 반대에서 나아가, 국전이 조장하는 그림의 방향 자체에 대한 회의와 맞물렸다. 그때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앵포르멜이었다. 기존 미술에 대한 반발이자 국전의 여인좌상으로 대변되는 형식적 구상화에 대한 반발인 동시에 미술계 제도를 장악하여 좌지우지하는 기득권자들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 반발이 해방 이후 새로 마련된 제도인 미술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것, 그리고 일본을 통하지 않은 서구, 그 중에서도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는 미국미술의 강력한 영향 아래 일어났다. 앵포르멜의 등장은 한국미술사에서 근대와 현대가 갈라지는 중요한 계기다. 그것은 습작이 아닌 이념으로서의 추상의 등장, 한 시대를 뒤흔든 일련의 정신적인 물결이고 그 결과물이 비정형회화로 드러난 것이다. 이 미술은 하나의 집단화 현상을 보이면서 화단의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앵포르멜이라는 집단 미술 운동이 등장하게 된 또 하나의 배경은 냉전 이후 미국 문화를 보편화하는 과정의 일환이라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미국에서 냉전 시대의 세계 체제를 개편하는 하나의 문화 정치 전략이라는 것이다. 이후 추상미술은 우리나라 미술에서 본격적인 분야로 자리 잡았다.

대략 1957년부터 논리성과 전문성을 갖춘 형성기가 시작한 해다. 전시에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반공사상과 자유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해서 순수미술론이 정착되었고 우월한 서구와 열등한 동양이란 구도로 서열화 된 세계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현대화, 세계화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황폐화한 국토 위에 실존과 부조리의 절망 그리고 탈출과 극복의 열망이 싹트는 가운데 추상미술론이 급격히 세를 더해 갔다.

현대성의 추구가 현대 사회의 모습이나 문제가 어떻게 미술로 표현되었느냐보다는 어떻게 서구 또는 미국미술의 경향을 흡수하여 표출해냈느냐의 문제로 치환된 것이 이때부터다. 미술은 우리나라 현대정치 / 사회의 여러 측면을 관심 밖으로 밀어놓고, 예술가 개인의 자아와 그 형식적 표현에 골몰하게 되었다. 사회적 인식을 드러낸 미술이 제도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던 일제 시기의 제도가 온존하고 있던 남한의 미술계에서 개인의 감수성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부각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서구사회에서 근대의 표징이었던 주체성의 문제는 이 지점에서 오로지 개인적 정체성으로만 소화되었다.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이 감수성의 해방, 정체성의 확립, 합리적 사회의 건설에 대한 열망 등을 표현하는 것이었다면, 식민지경험을 지닌 한국의 모더니즘미술은 따라가야 할 서구화와의 등치에 대한 끝없는 열망의 표현이었다. 60년대 이후부터 여러 단체와 그룹이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던 미술 동향에 주목하여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창작미협의 그간의 연혁을 들여다보니 1961년에 홍종명이 새로 들어왔고 6회에는 이준, 박항섭, 박창돈, 황유엽, 이봉상이 빠져있다. 7회에 대거 신입회원이 들어왔으며 이때부터 정문현은 지속적인 참여를 보인다. 8회부터는 실질적으로 최영림, 류경채, 고화흠, 정문현이 주축이 되어 창작미협을 이끌고 있다는 인상이다. 1968년 13회에 들어온 하영식이 이후 줄곧 참가했으며 이후 류경채, 이기원, 정린, 하영식이 줄곧 협회에 참여해오고 있었다. 창립부터 이후 줄곧 창작미협을 이끈 이가 류경채 임을 보여주는 자료다. 류경채는 단지 창립회원과 리더로서의 역할에 국한된 게 아니라 이 협회의 작품경향 또한 은연중 견인해왔음을 볼 수 있다. 많은 작가가 들어오고 나갔지만 류경채는 줄곧 협회를 지켰고 그 안에서 자신의 추상스타일을 영향력 있게 전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서정적인 추상이면서도 기하학적이다. 그런 영향이 가장 강하게 검출되는 작가가 이기원, 하영식, 하관식 등이다. 이들 작가 외에도 잠깐이나마 참여했던 중요한 추상작가로는 이봉렬, 정점식, 홍정희, 최욱경 등이 있다. 이러한 참여 작가들의 면모를 보면 당시 창작미협이 한국 화단에서 추상미술계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뛰어난 작가들의 참여가 많았다고 본다. 당시 추상작업의 중요한 성과들을 아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작가, 작품을 골라내는 안목이 이 협회의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처럼 1980년대 중반까지는 협회구성원의 대부분이 추상작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창작미협은 그간 비교적 일관된 작가 개인의 작품을 존중하는 선에서 유지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작품경향은 물론 추상인데 이 추상은 당시 서구현대미술의 여러 경향과 논리 속에 부침되는 게 아니라 “유럽미술의 간접적인 이식미술의 영향에서 벗어나 나름대로의 우리 풍토 속에서 성장발전 할 수 있는 창작이념” (이준)이른 취지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류경채의 추상이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 향토색과 민족미술의 논리에서부터 시작해 해방 이후 추상미술의 경도 속에서 한국의 문화적 전통의 추상화라는 과제 속에서 추구된 작업으로 이해된다. 자국의 문화적 전통의 서정적 추상이란 목가적, 낭만적 향토주의의 소재화를 추상형식 안으로 수렴하는 데서 빚어진 결과물이다. 그것이 류경채의 그림이다. 향후 창작미협 회원들이 몇몇 구성원들은 이 그림의 틀을 이어받는가 하면 이를 화면의 구조 안에서 녹여내는 차원으로 이끌고 있다. 호명에 대한 구조적이고 구축적인 관심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후 1980년대 후반부터 최근에 이르는, 공모전을 통해 들어온 신입회원들은 비구상회화뿐만 아니라 워낙 다기한 흐름과 양상이 혼재하고 있어서 더 이상 특정 경향으로 창작미협의 성격을 규정하기 어렵게 한다. 그러니 이준이 언급했던 창작미협의 결성배경에 따른 역사적 의의와 성격 등을 현재의 창작미협 안에서 유추해내기는 어렵다. 대신 오늘날 여전히 그룹 활동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동시대미술에서 창작미협 회원들 간의 결속과 작품 활동의 독려를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에 대한 논의와 모색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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