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이익 없고, 죽어도 손해 없다
살아서 이익 없고, 죽어도 손해 없다
  • 김승현 기자
  • 승인 2015.04.15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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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서울 그때를 아십니까?

 

세월에 따라 강산도 변한다고 해요. 그런데 요즘은 굳이 세월이라고 할 것도 없이 빨리 빨리 변하고 있는 게 서울의 모습이에요. 자고 일어나면 생겨나는 아파트, 그리고 새로운 빌딩들…. 아주 정신을 못차릴 정도지요? 여러분도 그런 경험 많이 있을 거에요. 그런데도 사방에선 고공크레인이 하늘을 찌르고, 포크레인이 땅을 파내고 있는 모습들 뿐이에요. 이러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찾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해요.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렇게 변화속도가 빨라졌을까요? 그건 근대화 이후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부터에요. 조선 왕조 이후 한반도의 중심이었던 서울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서울이 조선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시골사람들에게는 살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건 알고 계세요? 이에 ‘사람의 새끼는 서울로 보내고, 마소 새끼는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이 생겨났을 정도에요.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서울>을 중심으로 근대화 과정에서의 서울을 매주 소개해볼까 해요. 사진에서 느껴지는 서민들의 삶이 풍요로운 오늘의 기반이 됐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더욱이 강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고충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셈이죠. 옛 서울의 모습도 감상하고 변화하는 생활상도 느껴보세요. 




 






1. 시장 상인들

보부상은 봇짐 장수와 등짐장수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통살 `장돌뱅이`라 불리는 가장 가난한 행상들의 하나였지만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보부상은 먼길을 떠나면 지게 꼭대기에 여벌의 짚신을 걸어 놓았다.
길을 가다 서로 만나면 반드시 인사를 해야 했고, 보부상 가운데 누군가 길에서 죽으면 이것을 발견한 다른 보부상들이 반드시 그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애도를 표했다.
등짐장사는 당시 소상인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이들의 생활은 "살아서 이익 없고 죽어도 손해 없다"할 정도로 매우 열악했다. 봇짐장수는 그나마 등짐장수보다 거래 범위가 넓었고, 약간의 자본이라도 소유한 편이었다.  




2. 빨래하는 여인들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전통적인 빨래는 옷감을 잿물에 담갔다가 강이나 개울에서 방망이로 두드려 빨았다. 우리나라의 옷은 흰 옷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빨래는 부녀자들의 힘든 노동거리였다.





3. ‘호∼, 호∼’, 한강에서의 겨울 빨래

겨울엔 한강의 꽁꽁 얼은 얼음을 깨고 손을 호호 불며 빨래를 하기도 했다. 빨래터는 또한 가부장제의 틀 속에서 고통받던 여성들의 대화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여자들은 매서운 시집살이와 집안 이야기 등을 풀어내 서로 하소연하기도 했다.





4. 한강에서 물긷는 아이들

예전 한강은 그 물이 매우 맑았으며, 아름다운 주변 경치와 낚시로도 유명했다. 수질 또한 깨끗해서 여자아이들은 빨래를 하고, 남자아이는 식수로 사용할 강물을 퍼서 물동이에 담아 나르기도 했다. 





5. 방아찧기

당시 일반 서민들은 곡식껍질을 벗기거나 아니면 곡식을 가루로 만들 때, 절구에 곡식을 넣고 방아를 찧었다. 방아찧기도 힘든 부녀노동의 하나였다. 부녀자들은 방아를 찧으면서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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