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효
윤창효

[광교신문=윤창효 칼럼] 지쳐있는 몸과 마음이 비상구를 찾고 있는 줄 몰랐다.

전형적 ‘까도남’으로 살아왔지 시골 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다. 시골은 어려서 부터 명절에만 부모님을 따라다니는 정도였다.  우리나라 오지중의 오지인 경남 거창 시골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돌을 지나자마자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이주하여 줄곧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당시 전쟁 후 피난민촌이 있는 시장 동네에서 자랐다. 말 달구지, 손수레꾼, 지게꾼,들이 분주하게 다니고 시장은 활발하였다.  6.25 동란 후 생필품을 조달하기에 무척 바쁘게 움직이는 희망 찬 시대였다. 우리도 도랑가에 군부대에서 나온 천막으로 엮은 집에서 기거도 하고 장사도 했다. 그야말로 생필품 몇 개를 진열해놓고 파는 행상 같은 일이었다. 활발한 시장분위기에 익숙한 소년으로 자랐다. 

산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학교 공부를 마치고 직장 생활을 한 후, IT업계에서  사업을 하다 보니 세계 대도시를 다니며 서울에서 30년 동안 사업을 했으니 ‘까도남’이 아닐 수 없다. 2000년초반 업계 등산모임으로 한 3년 산으로 질질 끌려 다닌 것이 산과의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부모님께서 시골에 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산은 얘기를 나눌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산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치산녹화 사업으로 민둥산으로 펼쳐져 있는 우리나라 산을 전국토에 전국민이 나무심기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중고등학교때 나무심기와 송충이 잡기에 학생들이 동원되는 시대였다. 장비도 좋지 못한시대에 그야말로 열악한 환경에서 지게를 지고 나무를 심고 물을 길어 나르는 시대였다. 

부모님께서도 시골에 사시는 친인척의 적극적인 권유로 임야를 사들이고 나무심기를 하셨다. 매우 힘든 작업을 했던 것이다. 군복무를 할 때라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 이후 우리 식구는 임야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10년 단위로 두어 번 가본 것이 전부 다였다. 

그후 아버지께서 은퇴를 하시고 시골에 집을 지으셨다. 시골집은 관리 차원에서 부산에서 사시는 부모님께서 시골로 오시고, 우리는 서울에서 내려가면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일, 벌초 및 집안 행사 등으로 다녔다. 겨울에는 추워서 아예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시골집이 싫었다. 

일년에 몇 번 밖에 가지 않으니 갈때마다 죽으라 일만 하다가 왔다. 전원적인 분위기에서 휴식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니었다. 자주 가지 않은 집이라 집안 청소 및 보수작업은 도착하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거기에다 제초작업도 장난이 아니다. 이름 모르는 풀들이 돌아서면 자라있었다.  나무는 또 왜 그렇게 잘 크는지 가지치기 일도 보통이 아니었다. 사다리를 걸치고 서툰 가지치기 작업은 위험하기 그지없이 아슬아슬 했었다.

산으로 가지 않았다. 산이 왔다.

2010년 위암 수술 후 사업이 나락으로 떨어 지고 있을 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운명을 맞이했다. 졸지에 시골 집과 임야를 돌봐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버지께서 돌아 가신지 얼마 안되어 시골 부동산업자로부터 전화 가 계속 왔다. 산을 팔라고 종용했다. 대부분 도시에 생활하는 자식들이 물려 받은 임야는 부동산 업자에게 좋은 먹이감으로 중개 대상이다. 

자식들은 돈도 안되고 무용지물인 산을 대부분 매각한다고 한다. 매매 임자가 나오지 않으면 국가에 팔아버린다고 한다. 산을 매도 할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하니, 이제는 나무 장사꾼들이 서울 집까지 직접 찾아왔다. 나무를 팔라는 것이었다. 

산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 해졌다. 어느 날 일간지에 “인생 2막을 임 林과 함께” 라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한국 산림아카데미’ 에서 ’ 산약초 전문가 과정’을 광고하는 것이었다.  매년 이런 저런 단기교육을 받았지만 대부분 업무와 관련된 커뮤니케이션이나 마케팅 교육이었다. 아내와  ‘산약초 전문가 과정’을 상의하니 아내가 더 좋아했다. 아내는 항상 약초나 산나물 등에 관심이 많았다. 같이 등록을 하게 되었다.

개강 강의 때 바로 ‘꽂혀’ 버렸다.  한국 산림 아카데미 조연환 이사장 (제25대 산림청장)께서 “산은 어머니이다. 온갖 동식물이 살아가는 생명의 터전이고 어머니처럼 한평생 아낌없이 주기만 한다.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 주고 정화된 공기를 내뿜으며 장마철에는 홍수를 막아주고 가물 때는 물을 흘러 보내 줍니다. 산사태를 막아주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기후를 만들어 줍니다. 인간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소와 피톤치드를 내뿜고 지구를 뜨겁게 만드는 탄산가스를 흡수하여 줍니다. 끝내는 몸뚱이마저 목재나 펄프 또는 땔감으로 우리 인간에게 다 내어줍니다. 나무의 혜택을 입지 않고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산은 어머니와 같습니다.”

가슴이 복받쳤다.  왜 이러는 건가. 뭔가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탈출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 항암 치료는 없었다. 암 재발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언제나 감싸고 있었다. 엎친데 덮쳐서 업계의 사양 사업화로 손실이 커 지고 있었다.  사업의 확장은 순식간이지만 축소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무래도 수술 후유증이 치명적이었다.  체력이 안되다 보니 새로운 프로젝트는커녕 치열한 경쟁을 견디기 힘들어 졌다. IT업계는 지속적 변화가 없고 시장의 변화에 빨리 응대하지 못하면 바로 죽음이다.

사업 축소에만 5년 이상 걸렸다. 그 와중에 모르는 분야에 손을 대다보니 사기꾼까지 가세했다.  추락은 시리즈별로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운명과 동생의 사망은 추락의 속도를 가중해 주었다.

조 연환 청장님의 개강 강의가 비상구의 불을 밝혀 준 것이었다. 그렇게 산이 내게로 왔다. 숲에서 무엇을 볼 수있을지 궁금하다.

 

필자는 서울에서 정보기술(IT) 업계에 30년을 종사 하다 현재 경남 거창을 오가며 임야를 가꾸고 임산물을 재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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