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의 시와 삶 (29)

최상현
최상현

[광교신문 칼럼=최상현]

어느새 8월

8월 / 반기룡

오동나무에 매달린 
말매미 고성방가하며 
대낮을 뜨겁게 달구고 

방아깨비 풀숲에서 
온종일 방아 찧으며 
곤충채집 나온 눈길 피하느라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푸르렀던 오동잎 
엽록체의 반란으로 
자분자분 색깔을 달리하고 

무더위는 가을로 배턴 넘겨줄 
예행연습에 한시름 놓지 못하고 

태극기는 광복의 기쁨 영접하느라 
더욱 펄럭이고 있는데

어느덧 8월이다. 세상은 온갖 희로애락이 뒤섞인 채로 늘 어지럽기만 하지만, 자연은 하늘이 정한 섭리를 따라 계절이 서서히 바뀌고, 해시계 노릇 하는 시골 마당의 바지랑대 그림자는 날마다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 6월이 한 해의 절반이지만 7월까지만 해도 아직은 올해 가야할 길이 멀고 살아갈 날들이 많이 남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8월이 되니 어느새 한 해의 뒷자리에 와 있음을 느낀다. 

8월은 각급 학교의 여름방학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겸한 휴가를 떠나는 달이다. 하지만 들판의 오곡백과는 무럭무럭 자라 열매를 맺는 달이고, 그래서 피땀 흘려 수고하는 농부들은 풍성한 가을을 맞을 기대로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마저 고맙게 여기고 있다. 아직은 한여름이지만 며칠 후에는 가을의 임명장처럼 입추가 다가오고, 말복과 처서를 거쳐 여름을 마감하여 정리하는 달이 8월이다. 짙어가는 풀벌레 울음소리에 별빛은 더욱 초롱초롱해지고 여름밤은 우리의 꿈과 함께 깊어간다. 

폭염경보가 내리고 덥다 덥다 하지만 작년에 유례없는 섭씨 40도의 무더위를 견디고 살아온 경험 덕분인지 견딜 만하다. 몇 개의 여름 태풍이 다가올 수도 있지만 올 여름은 장마도 큰 피해를 남기지 않고 순하게 지났다. 뜨거운 태양을 마시며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들과 무르익어가는 들판의 오곡백과처럼 이 8월에 우리도 몸과 마음을 더욱 튼튼하게 키우고 살찌우면서 잘 지내야 한다. 그리고 풍성한 가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을 건강하고 즐겁게 살면서 가는 세월을, 아니 오는 세월을 기쁨으로, 보람으로, 행복으로 차근차근 채워나갈 수 있다. 

서두에 소개한 반기룡 님의 <8월>은 8월의 정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한 편의 드라마처럼 재미있고 의미있게 잘 그려내고 있다. 오세영 님의 <8월의 시>는 8월을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라고 말하고, 최홍윤 님은 <8월에는>에서 ‘살아 있음에 고마울 뿐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가슴 벅찬 일’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삶에 대한 깊은 사색과 성찰의 씨앗을 던져주고 있다. 임영준 님은 <8월의 기도>에서 ‘온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8월이 되기를 빌고 있다. 이해인 님은 <열두 달이 친구이고 싶다>라는 시에서 ‘8월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힘들어 하는 그들에게 / 웃는 얼굴로 차가운 물 한 잔 줄 수 있는 / 여유로운 친구이고 싶다’고 노래한 바 있다. 정갑숙 님은 풀잎에서 노래하는 풀벌레를 <셋방살이>로 재미있게 그렸다. 

8월의 시 / 오세영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8월은 오르는 길을 잠시 멈추고
산등성 마루턱에 앉아
한번쯤 온 길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달이다.

발아래 까마득히 도시가,
도시엔 인간이,
인간에겐 삶과 죽음이 있을 터인데
보이는 것은 다만 파아란 대지,
하늘을 향해 굽이도는 강과
꿈꾸는 들이 있을 뿐이다.

정상은 아직도 먼데
참으로 험한 길을 걸어왔다.
벼랑을 끼고 계곡을 넘어서
가까스로 발을 디딘 난코스,

8월은 산등성 마루턱에 앉아
한번쯤 하늘을 쳐다보게 만드는 달이다.
오르기에 급급하여
오로지 땅만 보고 살아온 반평생,
과장에서 차장으로 차장에서 부장으로
아, 나는 지금 어디메쯤 서 있는가,

어디서나 항상 하늘은 푸르고
흰 구름은 하염없이 흐르기만 하는데 우러르면
먼 별들의 마을에서 보내오는 손짓,
그러나 지상의 인간은
오늘도 손으로 지폐를 세고 있구나.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한 오는 것.

풀섶에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케 하는 달이다.

8월에는 / 최홍윤

봄날에 
서늘하게 타던 농심(農心)이 이제 
팔 부 능선을 넘어서고 있다 
된더위 만나 허우적거리지만 
기찻길 옆엔 선홍빛 옥수수 
간이역에 넉넉히 핀 백일홍 
모두가 꿈을 이루는 8월이다 

숨 가쁘게 달려온 
또 한해의 지난날들 
앳되게 보이던 
저어새의 부리도 검어지는데 
홀로 안간힘으로 세월이 멈추겠는가 

목 백일홍 꽃이 지고 
풀벌레 소리 맑아지면은 여름은 금세 
빛 바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고 마는 것 
우리가 허겁지겁 사는 동안 
오곡백과는 저마다 숨은 자리에서 
이슬과 볕, 바람으로 살을 붙이고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단지, 그 은공을 모르고 
비를 나무라며 바람을 탓했던 우리 
그리 먼 곳보다는 
살아 있음에 고마울 뿐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가슴 벅찬 일인데 
어디로 가고 
무엇이 되고 무슨 일보다, 
                           
8월에는 심장의 차분한 박동 
감사하는 마음 하나로 살아야겠다

8월의 기도 / 임영준

이글거리는 태양이
꼭 필요한 곳에만 닿게 하소서
가끔씩 소나기로 찾아와
목마른 이들에게 감로수가 되게 하소서
옹골차게 여물어
온 세상을 풍요롭게 하소서
보다 더 후끈하게 푸르러
추위와 어둠을 조금이라도 덜게 하소서
갈등과 영욕에 일그러진 초상들을
싱그러운 산과 바다로 다잡아
다시 시작하게 하소서

셋방살이 / 정갑숙

풀잎이 
전세를 놓았다 

풀벌레가 
전세를 얻었다 

풀잎은 
전세값으로 노래를 받아 
날마다 기뻤다 

풀벌레는
전세값으로 노래를 주어 
날마다 즐거웠다. 

■ 프로필

- 1979 공주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 1983년부터 36년간 고등학교 영어교사, 장학사, 교감, 교장을 역임하고 대전관저고등학교에서 퇴임

- 시 읽기, 시 낭송, 시 상담에 큰 관심을 갖고, SNS를 통한 시 나눔에 힘쓰고 있는 등단 시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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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칼럼은 신문사의 논지와 견해에 있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