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의 시와 삶 (15)

최상현
최상현

[광교신문 칼럼=최상현] 5일간의 설 연휴가 지났다. 한때는 이중과세라는 죄목을 붙여 설을 구정으로 폄하하고 양력 11일을 신정이라고 하여 그날만 쉬도록 강제한 적도 있다. 하지만 오랜 전통과 풍속으로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명절을 법으로 바꿀 수는 없다.

어떤 이는 우리에게 설날이 있는 것은 패자부활전을 허용하는 셈이라고 말한다. 양력 새해에 새로운 마음으로 새 꿈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새로 시작할 기회를 한 번 더 주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설을 기다리며 2월을 맞이하고 입춘과 함께 설을 보내면서 봄에 대한 소망과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안고 새 날을 열었다.

설을 쇠는 마음은 옛날이나 지금이다 크게 다르지 않지만 설을 쇠는 풍속은 많이 달라졌다. 부모, 형제자매, 많은 일가친척들이 대부분 가까이에 살던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시대를 거쳐 정보화 사회로 급변하면서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골 고향에서 자란 60대 이상의 어른들은 어릴 적의 설날을 추억하면서 그리움과 아쉬움을 많이 느낀다. 젊은 세대는 그들대로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있다.

서로 느낌은 다르고 힘든 일도 적지 않지만 설은 뿌리와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삶을 다듬으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소중한 기회이다. 설을 쇠면서 우리는 묵은 삶의 보따리를 풀어 아쉬움과 슬픔과 아픔을 털어버리고 새 희망과 새 힘을 얻어 다시 새로운 삶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는다.

설을 보내며 함께 읽고 나누고 싶은 시들을 소개한다. 조정숙의 <친정>과 고혜정의 <친정엄마>는 설날 가장 많이 떠오르는 친정어머니에 대하여 가슴 저리게 쓴 시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친정어머니들과 그들의 딸들이 가슴으로 읽을 시이다. 이채의 <중년의 명절>은 고향 떠나 힘들게 살아온 중년의 소회를 가감 없이 그려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시이다. 이재무의 <팽나무가 쓰러졌다>는 사라진 고향의 모습, 잊혀진 유년시절의 추억을 아쉬워하는 좋은 시이다.

 

친정 / 조정숙

 

나 가끔 친정으로 돌아가면

금세 엄마의 어린 딸이 되어

먼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몸도 마음도 녹신녹신해져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한 일들

그만 까마득해지고

길을 가다 지나쳐 만난 사람처럼

남편 얼굴도 서먹서먹해져서

엄마 손에서 익은 물김치

호록호록 떠먹어가며 밤새도록

친구 같은 수다를 떨었네.

 

엄마도 참 고생이 많수

서로 마음을 만지작거리다가

, 사는 게 그리 호락호락 한 줄 아나

좀 더 살아봐라 내 맘 알끼다

엄마를 관통한 바람이

목적도 없으면서

천천히 나에게 불어오는

내 속엔 작은 엄마가 있어서

가는 허리가 자꾸 휘청거린다.

 

친정엄마 / 고혜정

 

사랑한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힘들 때 왜 날 낳았냐고 원망해서 미안해.

엄마 새끼보다 내 새끼가 더 예쁘다고 말해서 미안해.

언제나 외롭게 해서 미안해.

늘 나 힘든 것만 말해서 미안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딸 자주 못 보여줘서 미안해.

늘 내가 먼저 전화 끊어서 미안해.

친정에 가서도 엄마랑 안 자고 남편이랑 자서 미안해.

엄마의 허리 디스크를 보고만 있어서 미안해.

괜찮다는 엄마 말 100퍼센트 믿어서 미안해.

엄마한테 곱게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잘나서 행복한 줄 알아서 미안해.

 

중년의 명절 / 이채

 

말이 없다 해서 할 말이 없겠는가

마음이 복잡하니 생각이 많을 수밖에

고향 산마루에 걸터앉아

쓸쓸한 바람 소리 듣노라니

험난한 세상, 힘겨운 삶일지라도

그저 정직하게 욕심 없이 살라고 합니다

 

어진 목소리, 메아리 같은 그 말씀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왔기에

떳떳할 수 있고 후회 또한 없다지만

이렇게 명절이 다가오면

기쁨보다는 착잡한 심정 어쩔 수 없습니다

 

부모형제 귀한 줄 뉘 모르겠는가마는

자식 노릇, 부모 노릇

나이가 들수록

어른 노릇, 사람 노릇

참으로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세상은 뜻과 같지 아니하고

삶이란 마음 같지 아니하니

강물 같은 세월에 묻혀버린

내 젊은 날의 별빛 같은 꿈이여!

올해도 빈손으로 맞이하는 명절

그래도 고향 생각 설레어 잠 못 들까 합니다

 

팽나무가 쓰러졌다 / 이재무

 

우리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 쓰러지셨다

고집스럽게 생가를 지켜주던 이 입적하셨다

단 한 장의 수의, 만장, 서러운 곡도 없이

불로 가시고 흙으로 돌아, 가시었다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내부의 텅 빈 몸으로 보여주시던 당신

당신의 그늘 안에서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고

이웃마을 숙이를 기다렸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아이스께끼 장수가 다녀갔고

방물장수가 다녀갔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부은 발등이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

우리 마을의 제일 두꺼운 그늘이 사라졌다

내 생애의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

 

 

■ 프로필

 

- 1979 공주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 1983년부터 고등학교 영어교사, 장학사, 교감을 역임하고 현재 대전관저고등학교 교장

- 시 읽기, 시 낭송, 시 상담에 큰 관심을 갖고, SNS를 통한 시 나눔에 힘쓰고 있는 등단 시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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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칼럼은 신문사의 논지와 견해에 있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