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치영 박사의 생명나눔 이야기 (2)

강치영
강치영

[광교신문 칼럼=강치영] 권태화 씨는, 1992년 11월 6일 밤 10시 30분경 인천 남구 주안동에서 오토바이를 타고가다 승용차와 부딪혀 뇌를 다친후 사고직후 인근 세광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아 왔어나 뇌사 판정을 받게되자, 가족은 평소 카톨릭 신자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해 온 권씨의 뜻을 받들어 장기기증 운동본부에 권씨의 장기 기증, 의사를 알려왔다. 본부에서는 이에따라 장기기증 서약을 받은후, 즉시 권씨를 서울 아산 중앙병원으로 옮기고 각 종합 병원에 연락해, 서울대병원에서 간장을, 아산병원 에서는 심장과 췌장을, 순천향 병원과 한양대 병원에서는 각, 신장 1개씩을, 그리고 각막은 연세 세브란스 병원과 필자의 요청에 의해 부산대학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에 있었던 권태화 씨의 다장기 이식수술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것 이었고, 더구나 각막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비행기로 이송돼, 이식수술이 행해 지는것도 처음있는 일이었다.

*부산에서의 첫, 장기 이식* 

부산에서 장기기증 본부가 설립되고 처음으로 장기 이식 결연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시신 기증을 한다는 유가족의 말을 듣고 진주까지,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온 터라 이번에는 실수없이 잘 처리되어야 할 텐데 하는 솔직한 심정에, 긴장과 함께 살짝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부산대학 병원의 담당자와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급히 김해 공항으로 향했다. 갑자기 공항에 앰뷸런스가 나타나고, 싸이렌이 울리고, 신문사와 방송 카메라 기자까지 나타나자 공항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네, 각막을 서울로 부터 이송하기 위해 왔습니다 매우 급합니다.

공항직원은 두눈을 크게 뜨며~ 각막이요??? 하며 다시금 재차 물었다.

아마 이직원은 각막을 수송한다는 것 자체가 생소하기도 하지만 처음있는 일이라 굉장히 의아해 하였다. 나도 장기기증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풍부하지 않던 때였지만 내 지식을 총동원하여 그에게 설명을 하였고, 내용을 파악한 공항직원은 무전기로 다른직원과 교신하며, 오히려 자기가 더 흥분하는 모습이었다. 어쨌던 그직원이 너무 고마웠다. 우리들의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용을 확인한, 공항측 직원이나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해 기다리던 승객들은 무슨 드라마의 한장면을 보는것 처럼 신기해하며 지켜 보았다.

다른 장기에 비하여 각막은 사후에 이식 가능한 시간이 상대적으로길기 때문에 사후 6시간 이내에만 각막을 적출하여 냉동보관 하면 장거리 지역까지 이동하여 이식이 가능하다. 그러나 조금의 오차라도 발생하여 문제가 발생한다면, 새로운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하여 애타게 기다리던 각막 이식 대기자는 또, 다시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수술 기회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된다. 따라서 장기이식 결연을 담당하는 필자는 성공적으로 이식 수술이 끝 날때까지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부산에서의 각막 이식 수술은 부산대학 병원 안과, 정근 교수의 집도로 저녁 8시경에 좌안 원추 각막 질환 증세로 실명 위기에 놓여 있던, 김승창 군(당시15세, 성동중 2학년) 의 왼쪽 눈에 이식이 되었다. 병원에서 김군의 가족과 함께 초조하게 수술 결과를 기다리던 나는, 성공적으로 수술이 끝났다는 정근 교수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는 김군의 가족과 함께 펄쩍펄쩍 뛰면서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강목사님!

승창군의 아버지는 너무 기쁜 나머지 나를 목사라 부르면서 꼭, 껴안으셨다. 어떤 이유로 나를 그렇게 부르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까짖 호칭이 무슨 대수 이겠는가. 당시만 해도 각막을 이식 한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고, 특히 그것을 공짜로 기증하고 기증 받을수 있다는 것은 성창군의 가족조차도 기대하지 않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 책받침에 찔려 한쪽눈을 실명한뒤 다른 눈까지 원추각막 질환으로 흐려져 하교까지 휴학하고 있는 딱한 처지 였었는데 그런데 아들이 그렇게 해서 다시 시력을 회복하고 정상인으로 건강하게 학업에 정진하게 되었어니 부모의 기쁨이 컸을터.

수술후, 성창군은 시력을 회복하여 정상적인 학업을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김승창군의 부모님이 우리 사무실을 찾아주셨다. 수고 하셨습니다 강국장님~ 승창군의 아버님은 흥분이 가라 앉으셨는지 오늘은 정확한 직책을 부르며 연신 고맙다고 하시며 가족 전체가 뇌사및 사후 장기기증 서약서에 서약을 하셨다. 그러면서 하마터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두눈의 시력을 잃고, 학업을 포기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아들 생각만 하면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었는데, 장기기증 운동 본부의 노력으로 아들이 시력을 다시 되찾아 너무 감사하다며 나의 두손을 꼭 잡았다.

부산에서 처음있는 장기이식 사례이다 보니, 김군의 가족 못지 않은 기쁨이 있었고, 남에게 자신의 장기를 기증 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보람된 일인지를 몸소, 체험하는 첫, 번째 경험이 되었다. 그래~ 장기기증 이라는 것이 이래서 필요한 것이구나. 장기기증은 그 주체인 기증자의 고귀한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 이지만, 기증자와 수혜자 쌍방간의 원활한 결연이 이루어져야 더욱 많은 이식 대기자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따라서 장기이식 결연사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만족할 만한 중계 역활을 해줄 숙련된 현장 전문가 가 필요하다. 나는 남을 위해 베풀 줄 아는 진정한 용기를 가진 소중한 분들을 접하면서, 장기기증 운동은 사랑과 희생으로써 그 열매를 얻을수 있다는 것을 하나하나 배워 나가면서, 장기기증 사업을 현장에서 담당하는 나의 마음 가짐도 새롭게 변화하며, 생명나눔의 길잡이로써 장기기증의 지평을 열어갔다.

 

■ 강치영 행정학 박사, 사단법인 한국장기기증 협회장

강치영은 대학에서 사회복지와 행정학을 배웠다. 지금까지 339명의 꺼져가는 생명을 살렸고, 국내 의학발전을 위해 103구의 시신을 의과대학에 기증, 국민 서로간의 화합 및 국민건강 증진, 화상환자를 위한 조직기증과 백혈병 어린이를 위한 골수기증, 및 장기기증을 통한 생명나눔의 외길을 걷고있어며, 저서로 *다시사는 세상,함께 나누는 생명*  장기기증과 거버넌스등 과 장기기증의 활성하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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