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만행을 고발하고 사죄를 요구하다가 끝내 못 듣고 눈 감아

[오풍연 칼럼=광교신문]김복동 할머니는 영웅이다. 부음을 접한 뒤 김 할머니에 관한 기사를 꼼꼼히 읽어봤다. 그동안 너무 몰랐다는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냥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아픔을 전세계에 알린 선구자였다. 오래 전 김구 선생의 백벌일지를 읽을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성 김구에 비견된다고 할까.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고인의 영면을 빈다.

할머니의 일생은 드라마 그 자체였다. 어떤 소설이 이보다 더 드라마틱할까. 평생 동안 일본의 사죄를 요구했지만 그 대답을 듣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우리 후손들이 반드시 일본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것이 할머니의 유언이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29일 빈소를 방문했다. 일본으로부터 사죄를 받아내는 것은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모두의 몫이다. 그래야 할머니가 편안하게 눈을 감으실 것 같다.

1926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1940년 14세의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일본군 침략경로로 끌려다니며 성노예로 살았다. 위안부로 끌려간 지 8년째인 1947년 21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66세 때인 1992년 3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처음으로 공개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았던 것이다.

할머니는 유엔인권이사회,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 매년 수차례 해외 캠페인을 다니며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활동에 매진했다. 2012년 전시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나비기금을 설립하고 전쟁, 무력 분쟁지역의 어린이를 위한 장학금으로 5000만원을 기부했다. 2017년 사후 모든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할머니의 통장에는 160만원만 남아 있었다고 했다. 장학재단 ‘김복동의 희망’을 만들고 일본 정부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재일동포 학생들을 도왔다.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한 최근까지도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쓰라며 3000만원을 내놓기도 했다.

할머니는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12월 한일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의견을 배제한 채 맺은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세워진 화해치유재단의 해산을 촉구하는 1인 시위도 벌였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집회의 상징이기도 했다. 김 할머니의 생전 마지막 소원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아베의 망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할머니는 가셨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이제 23명으로 줄었다. 일본이, 아베가 더욱 야속하다.

오풍연 칼럼니스트
오풍연 칼럼니스트
  • 1979년 대전고 졸업
  • 1986년 고려대학교 철학과 졸업
  • 1986년 KBS PD, 서울신문 기자 동시 합격
  • 1996년 서울신문 시경 캡
  • 1997년 서울신문 노조위원장
  • 2000 ~ 2003년 청와대 출입기자(간사)
  • 2006 ~ 2008년 서울신문 제작국장
  • 2009년 서울신문 법조大기자
  • 2009 ~ 2012년 법무부 정책위원
  • 2011 ~ 2012년 서울신문 문화홍보국장
  • 2012. 10 ~ 2016. 10 파이낸셜뉴스 논설위원
  • 2012. 09 ~ 2017. 02 대경대 초빙교수
  • 2016. 10 ~ 2017. 09 휴넷 사회행복실 이사
  • 2017. 10 ~ 현재 오풍연구소 대표
  • 2018. 05 ~ 현재 오풍연 칼럼방 대표
  • 2021. 05 '윤석열의 운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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