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희의 다이알로그

최순희
최순희

[광교신문 칼럼=최순희] 방송 현업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후배들에게 전하는 말이 있다. 방송국은 일을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에겐 천국이다. 반면, 그저 일로만 여긴다면 지옥이다라고. 방송 일은 끝이 없고 마감을 스스로 정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방송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다. 그 시간까지는 끝내야 하니까.

PD와 기자, 카메라맨이 일하는 방송국 직렬을 현업이라고 말한다. 현업 현장엔 보통 보도국과 제작국의 기자와 PD, 카메라맨이 일한다. 기수를 중요하게 여기는 보도국은 기자의 충원이 정기적으로 이뤄지고 여성 비율이 PD에 비해 높은 편이다. 2000년 중반, 제작국은 IMF 이 후, 인력 충원을 정기적으로 하지 않아 여자 후배는 물론 남자PD도 귀했던 반면, 보도국은 제작국에 비해 인력이 비교적 풍부했다.

80년 대 중반, 라디오PD는 야구시즌에는 일주일에 몇 번씩 정규 프로그램 외에 저녁에는 생중계 방송을 해야 했다. 20년이 지난 시점인 2000년 대 중반, 프로야구는 붐이 일어났고 야구를 포함해 광고수익이 좋은 스포츠 중계는 TV로 중계부서가 옮겨졌다. 보도국이 주관 부서가 되면서 나는 스포츠 중계와 탐사보도 제작을 담당하는 CP로 보도국 발령이 났다. 갑작스런 기자 발령에 주변에선 걱정을 했지만, 스마트하고 현실감각이 높은 기자들과의 협업은 속도감이 있어서 좋았다. 제작국에서 경험하지 못한 여자 후배도 두 명이나 있었다.

현업을 떠났지만 그 때의 인연은 여러 후배들의 교류로 이어지면서 현업 인력의 변화를 실감하곤 한다. 시청자 입장에서도 재난 보도를 볼 때면 폭우 속 중계차 연결을 하면 90% 이상의 여성 기자 비율을 발견하면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엊그제 만난 여자 후배PD는 바로 내가 했던 30년 전의 고민을 털어 놓는다. 결혼을 생각하고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 댁에서는 오랜 취업준비 기간을 기다려 준 시간을 생각해서라도 빨리 결혼 날짜를 잡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입사 후의 생활을 감안하면 결혼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라는 것이다. 일의 강도가 엄청나다는 말이다. 개인 생활을 가질 수 없는 현실, 앞서 걸어 가는 선배를 보더라도 크게 개선될 것 같지 않아서 고민이라는 요지이다. 기본적으로 방송인들은 평균 노동시간보다 긴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다. 한정된 스튜디오와 인력이 매체 편성시간을 메꿔야 하는 콘텐츠 생산의 구조적인 한계 때문이다.

라디오 뉴스 저널리스트 연구를 한 잔 하워드(Jan Howarth)가 쓴 용어가 있다. 미디어 업계에서 아이를 가진 여성들이 풀타임으로 일하다가 후퇴하는 경향을 두고 '미닫이 유리문 증후군'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한 마디로 여성들은 업무 수행을 잘 하다가도 출산에 직면하면 유리천장은 고사하고 미닫이 유리문을 통해 뉴스룸을 떠날 위험성이 높다는 의미이다. 많은 지망생들이 열망하는 TV 아나운서 분야는 더 심각하다. 이 분야는 훌륭한 외모가 직업적 전망을 오랫동안 좌우해 왔고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몇몇 주류 언론사 이 외의 중소 방송 매체는 같은 일을 하는 아나운서 직렬이라 하더라도 남성은 정규직으로 채용을 하고 있지만, 여성의 경우 계약직 채용이 당연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새로운 목소리를 내고 시청취자와 소통하는 참신한 방식을 개발해서 미닫이가 아닌 천장까지 대리석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업무의 강도를 일이 가진 재미로 대체해 왔던 선배로서 답답하기만 했다. 몇몇 예외적 변화에 만족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관행과 방식이 광범위하게 자리를 잡아야하는 지난한 변화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방송기자와 PD조직은 모험적이고 용감한 남성적 자질과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직업군이다. 그 속에서 여성은 휴일에도 에누리 없이일해야 하고 ‘24시간 방송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사회공유물로서 스스로를 내면화해 온 직업적 이상화와 관행의 사고에서 빠져 나오는 일부터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최순희

-배재대학교 교수

-대전충남 민주언론실천운동연합 운영위원장

-전) 대전MBC R/TV프로듀서, TV제작부장

 

저작권자 © 광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위 칼럼은 신문사의 논지와 견해에 있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