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을 돌보고 집안의 '우애'를 다지는 행사

▲ 오풍연 고문

고향에서 벌초를 하고 왔다. 내가 태어난 곳은 충남 보령시 청라면 라원리 상중부락. 그곳에 선영이 있다. 6기의 묘지가 있다. 증조부모, 조부모, 아버지 형제 네 분의 묘다. 아버지 형제 중 셋째 작은아버지, 어머니와 넛째 작은어머니만 살아계시다. 세월무상을 느낀다.

벌초는 집안의 가장 큰 행사다. 대부분 추석 1~3주 전쯤 벌초를 마친다. 어제 가장 많았던 것 같다. 하루종일 고속도로가 밀렸다고 한다. 우리는 그래서 벌초하려 갈 때 승용차를 안 타고, 기차를 이용한다. 그럼 편하게 왕복할 수 있다.

우리 집안도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손들이 모두 모인다. 그런데 해마다 참석자가 줄고 있다.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부득이 참석할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많을 때는 50~60명 가량 참석했으나 이번에는 20명만 참석했다. 그래도 적지 않은 수이기는 하다.

나도 서울서 혼자 내려갔다. 아내는 다른 일정으로, 아들은 근무라서 함께 가지 못했다. 아버지 4형제는 아들을 셋씩 두었다. 그러니까 4촌만 12명이다. 제일 위 큰집 형님이 65살, 셋째집 막내가 49살이다. 모두 결혼했다. 조카들도 집집마다 1~3명씩 있다.

고향에서도 우리 집안을 부러워했다. 수십명씩 참석해 우애를 다지니 좋아 보이는 모양이다. 잘 되면 제 탓, 안 되면 조상 탓을 한다고 했다. 조상을 잘 모셔야 한다. 그것은 후손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기 부모 묘소조차 벌초를 하지 않는 자식도 있다.

나도 지금까지 벌초 행사에 한 두 번 빠진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참석했다. 외국 출장 때문이다. 2000년대 초 청와대를 출입할 때 김대중 대통령을 동행해 취재를 나선 까닭이다. 아쉬워도 참석할 수 없었다. 지금 고향에는 가까운 친척이 한 분도 안 계시다. 성묘하러 오지 않으면 고향을 찾을 일도 없다.

벌초도 이제 점차 사라지는 문화가 되고 있다. 화장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산소도 잘 쓰지 않는다. 관리 또한 쉽지 않다. 요즘 아이들은 벌초하러 가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도 우리 집안은 나은 편.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전원 참석을 원칙으로 한다. 어제 참석하지 못한 조카들은 나름 이유가 있었다.

묘지를 깨끗이 깎으면 보기도 좋다. 조상님들도 흐뭇해 할 터. 제사를 지낸 음식을 산소서 나눠 먹은 뒤 점심은 면 소재지 식당에서 했다. 올해 79살인 셋째 작은아버지가 제일 어른이다. 건배사를 제의하신다. 해마다 똑같다. "모두의 건강을 위하여" 작은아버지 내외는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서울 올라가는 무궁화호 열차 안에서 이 글을 쓴다. 장항선은 ktx가 없어 대천서 영등포까지 2시간 30분이나 걸린다. 게다가 12분 연착 방송을 한다. 나 말고도 벌초를 마치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고향에 다녀가면 기분이 좋다. 내년 벌초 행사도 벌써부터 기대된다.

오풍연 칼럼니스트
오풍연 칼럼니스트
  • 1979년 대전고 졸업
  • 1986년 고려대학교 철학과 졸업
  • 1986년 KBS PD, 서울신문 기자 동시 합격
  • 1996년 서울신문 시경 캡
  • 1997년 서울신문 노조위원장
  • 2000 ~ 2003년 청와대 출입기자(간사)
  • 2006 ~ 2008년 서울신문 제작국장
  • 2009년 서울신문 법조大기자
  • 2009 ~ 2012년 법무부 정책위원
  • 2011 ~ 2012년 서울신문 문화홍보국장
  • 2012. 10 ~ 2016. 10 파이낸셜뉴스 논설위원
  • 2012. 09 ~ 2017. 02 대경대 초빙교수
  • 2016. 10 ~ 2017. 09 휴넷 사회행복실 이사
  • 2017. 10 ~ 현재 오풍연구소 대표
  • 2018. 05 ~ 현재 오풍연 칼럼방 대표
  • 2021. 05 '윤석열의 운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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