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민이 만난 사람] 방글라데시에서 온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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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여학생의 감성을 쥐고 흔드는 하이틴 로맨스 소설. 방글라데시에서 그걸 찍어내던 출판업자가 있었다. 그는 한국에 와 섬유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3년 정도 돈 벌어 공부하려는 뜻에서 말이다. 하지만 운명이 그를 인도한 것은 이주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자리였다. 비단 시위 농성장만이 아니다. 방송사, 영화 촬영장이라는 미지의 세계도 그에게 펼쳐진 가치 실현의 장이었다. 마붑 알엄. 2010년 11월에 왜 그를 만날까. 40년 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전과 더불어 자기 몸을 살랐던 열사가 바로 전태일이기 때문이다. 막연하다. 두 사람에게 섬유공장 노동자라는 점 외에 어떤 공통점이 있기에 ‘엮으라는 것’인가. 인터뷰이를 소개받자마자 차이점부터 꼽아봤다. 중요한 세 가지가 있었다. 우선 다른 국적, 둘이 역사 속에서 단 1초도 공존했던 시기가 없었다는 점(전태일은 1970년 산화, 마붑 알엄은 1977년 출생), 근로기준법이 허울뿐이던 그 때보다는 구조적으로나 내용면에 있어서 훨씬 개선된 현재의 노동환경이었다. 이런 가운데 10월 22일 저녁 7시 참여연대 3층 중회의실에서 그를 직면했다. 나는 이 자리를 ‘전태일의 가치를 발견한 자리’라고 말한다.



‘욕심 없음’, 방글라데시의 낙관이 한국에서 실의로

살아 있을 때 방글라데시 사람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방글라데시하면 가장 가난하면서도 국민의 행복도가 높은 나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는 감회’를 말이다. 즉답이었다.
 
“요컨대 ‘욕심 없음’으로 말할 수 있어요. 큰 홍수가 나서 옥상으로 대피한 한 할아버지는 미국 CNN기자가 감회를 물었을 때 ‘이 물은 며칠 지나면 빠지겠지’라며 심드렁하게 말하더라고요. 인근 인도 댐건설부터 지구 온난화까지 구조적이면서도 직접적인 원인을 찾자면 꼽을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고, 응당 이를 분노에 실어 전 지구에 항변할 수 있을 텐데도 말이지요.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대응이지요? 저도 한국 사람이 다 됐나 봐요. 방글라데시 사람들과 뭔 일을 하려다가도 낙관을 넘어 관조하는 태도를 보이면 실의에 젖게 되거든요. 생각해보면, 아침에 학교에 갔다가 오후 1시에 돌아와서는 밥 먹고 강가에 나가 배타고 논 다음 해 지면 집에 들어와 또 밥 먹고 자는 이런 유년기 일상을 보냈던 저였는데 말입니다.”

“학자, 예술가였던 사람들이 한국에선 노예로”

1999년, 돈 벌기 위해 발 딛은 땅, 한국. 남들만큼 적응 과정에서의 소외와 진통은 없었다. 공장장급에 해당하는 고참 이주노동자로 터를 잡은 형 때문이다. 이런 여유 때문이었을까. 그는 다른 이들의 처지에 눈을 돌리게 됐다. 기막혔다. 아무런 항변을 하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각자의 나라에서는 학자요, 예술가요, 스포츠 선수였던 이들이 이곳에 들어와서는 하향 평준화돼 노예가 돼 버리는 현실이었다. 반말은 기본이요, 말 안 들으면 때리고, 부상당하면 못 본 척 한다. 욕먹고, 뺨 맞고, 손가락 잘린 본인도 이 비정한 현실의 한 당사자일뿐. 팔자로 생각하려 했다. 해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같으면 법체계 그리고 치안 시스템에 호소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주노동자가 그런 카드를 섣불리 썼다가는 추방이라는 자충수를 택하는 꼴이 된다. 울분을 누르지 않기로 했다.
 
돌아봤다. 믿을 것은 ‘각자’에서 ‘함께’였다. 연대의 틀을 만들기로 했다. 잠자리 없으면 자리 좁혀 한 방에 같이 자도록 했다. 누군가 다치면 서로 각출해 치료비를 대줬다. 휴일에는 함께 놀러 나갔다. 휴가철에는 바다로 떠나기도 했다. 차츰 동지들이 늘었다. 이들의 발언권도 그만큼 비례해 커졌다. ‘빨간 날’ 쉬게 해 달라, 야근 싫다, 급여 제 날짜에 지급하라 등 요구도 거침없어진다. 휴일 없이 하루 12~14시간 일하는 이들에게 침묵과 굴종을 강요하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진정성도 있었다. 회사가 어려울 때 월급을 희사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가 중심이 돼서 벌인 일이다.

그러나 이런 주체적 ‘자아’ 찾기, 즉 탈 노예선언은 공교롭게도 그의 형님이라는 ‘타자’의 그늘 아래에서 가능했던 상황이다. 형님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본인만 남게 되자, 모두가 변색했다. 회사와 동료, 처지는 달라도 정서는 같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여기 노동운동하러 왔나’ 이런 냉소였다. 동료들의 반발에 심하게 아렸을 것 같다. 자신의 권익을 찾자는 취지인데 왜 이걸 외면할까. 이들은 노예인가. 아니면 노예화한 것일까. 아니다. 나서면 나설수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감시망 포위망은 좁혀지게 됐다. 신분이 불안정한 이들로선 불이익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르렀다. 생계로 양심을 옥죄는 신자유주의의 광풍은 누구도 비껴갈 수 없었다.

“힘없고 가난한 이주노동자 친구는 없는 건가요”

좌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우군友軍을 찾았다. 비정부기구, 즉 NGO에 도움을 구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종교, 특히 개신교 기반의 NGO의 태도가 문제였다. 첫 번째 맞닿은 NGO는 개신교 계열이었다. 이들은 ‘조건’을 내걸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성경을 읽고 기도와 찬양을 해야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그, ‘아멘’만 안 하면 되겠지 싶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물론 ‘몇 푼 안 되는 돈에 배교背敎할 수 있는가’하는 친구의 비난은 부담으로 남았다.

그래서 또 다른 조력자를 찾았다. 이번에도 개신교 단체. 그래도 앞선 경우와는 양상이 많이 달랐다. 신앙을 강요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깔보는 시선’에 있어서 말이다. 하대하고, 이용하고, 동정하고, 너무 싫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넓지 않았다. 협력했다. 어느새 자신은 이주노동자 동원책이 됐다. 단체가 행사를 열면 어김없이 친구들을 불러 모아 세워야 했다. 뒤안길,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는 속에, 언론은 어느새 이 단체의 장을 ‘이주노동자의 아버지’로 추앙했다. 자신과 친구들은 재주 부리는 곰 신세가 된 것이다.

이 나라 언론, 심지어 지각 있다는 NGO 인사조차 이주민을 값싼 동정의 대상으로 보는 구도에 절망한다. 이주민들이 힘들어하는 건 맞다. 하지만 힘들어 보이는다는 값싼 동정 몇 마디만으로 이주민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는 것인가. 이들을 힘들게 하는 배경 즉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개선 노력이 긴요하다.

“저보다 나이는 많지만 아끼는 파키스탄 친구가 있어요. 40대라서 일자리 잡기 쉽지 않죠. 그래서 제가 욕조 만드는 공장을 소개했어요. 그러나 먼지에 시달리는 것은 기본이고, 만든 물건을 이동하는 일까지 도맡다보니, 육체노동 강도는 대단했죠. 그러다가 사고를 당했어요. 죽을 뻔 했던 만큼 부상 강도가 심해 3개월 입원하게 됐지요. 물론 공장은 외면했고요. 전 날마다 병실을 찾았어요. 혼자 한국에서 돈 벌던 그 친구, 가족과 국제 전화할 때면 ‘나 탈 없이 잘 있어’하며 연기하더라고요. 슬프기보다는 분노가 치밀었어요.”

여기서 전태일의 환영幻影이 느껴졌다. 2만 여 명이나 되는 봉제공장의 재단사로 일하면서, 주변에서 나이어린 소녀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중노동에 박봉의 생활을 하는 것을 목격한 전태일.

그가 나타낸 의분義憤이, 마붑 알엄의 눈에서도 불꽃처럼 피어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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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있던 자리에 우리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세 가지 공통점이 떠올랐다. 마붑 알엄은 이주노동자도 동등한 지구인이라 말한다. 전태일은 노동자도 동등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하나. 마붑 알엄은 노동자성 인정을 목청껏 높이고 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의 준수를 요구했다. 덧붙여 하나 더. 마붑 알엄은 그리고 전태일은 벽을 벽이 아닌 문으로 생각하며 뚫고 나갔다.

그래서 마붑 알엄은 이주노동자연대협의체를 만들어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다. 전태일은 삼동친목회를 조직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물론 마붑 알엄의 노동운동, 대안언론 건설, 영화를 통한 여론 환기와, 전태일의 처절한 죽음. 그들의 돌파구에는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자본의 욕망과 약자의 희생이 반복되는 현실, 주체적 노력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는 40년 전후 이 땅에 섰던 또 서 있는 두 사내 사이를 관통하는 가치이다.

“2002년에 노동운동하면서 알게 된 전태일 열사입니다. 1년간 농성하면서 그의 묘지도 가보고 그의 이름으로 마임팀을 만들어 활동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나 힘든 농성에도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 절망했습니다. 40년 전 같은 고독으로 죽음을 결행한 전태일을 가슴으로 만나게 됐던 계기였지요.

이렇게 그와 나는 상통하는 게 적잖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있던 자리에 지금 우리가 있습니다. 노동자로서 인정받고 싶고 또한 똑같은 인간으로서 예우 받고 싶은 마음, 그와 내가 같다는 것입니다.”

차별과 비인간적 속박, 열정으로 태울 터

전태일은 자신의 몸과 함께 미래까지 불태웠다. 살아서 투쟁하는 마붑 알엄에게 ‘꿈’을 물었다.

“방글라데시에서 대안학교를 만들려고요. 아이들을 대상으로 미디어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미디어 활용도를 높여 아이들에게 더 큰 세계를 보여주고, 자신을 세계에 드러내게 하고 싶습니다. 몸을 살라야만 사람들이 주목할 거라 믿었던 전태일의 비극, 이걸 그치게 하고 싶습니다.”

전태일에게 미디어가 있었다면,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와 그 흔한 블로그, 미니홈피, 트위터가 있었다면. 여공의 참담한 일상을 공개하고 법적 제도적 개선이라는 결과물도 얻어냈을 텐데. 저학력 저임금 육체노동자 전태일이 끝내 이루지 못한 차별해소와 인간다운 삶의 이념은 이제 고스란히 지구인 마붑 알엄에게 맡겨졌다는 생각이다. 전태일은 불이었지만, 마붑 알엄은 열정으로 태울 일이다.


인터뷰 후에

1박 2일의 G20 정상회의 개최만으로도 30조 수입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 정부이다. 대부분이 간접효과, 즉 기대치이다. ‘하루라도 입맛에 맞게 부풀리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질타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높아진 위상을 세계에 알린다는 자리에, 집회와 시위를 원천봉쇄하는 것으로 모자라, 이주노동자들을 테러 우범자로 인식하고 매도하는 시각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불법 체류자’라는 말부터 바꿔야 합니다. 이는 위법자 및 범죄자라는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등록 체류자’입니다. 등록하지 않고 체류하는 것이 범죄입니까? 존중해줘야 합니다.

척박한 정부의 인식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닌 듯하다. 최근 인터넷 안에서는 이주노동자가 한국인의 일자리를 앗아간다느니 이들이 언제 테러세력으로 돌변할지 모른다느니 하는 악의적 주장이 난무한다. 이런 공간 안에서 균등한 삶의 권리를 요구하는 마붑 알엄 씨의 목소리는 또 다른 공격거리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세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성 하나만 믿고 결혼을 승낙한 그의 세 살 위 한국인 아내가 궁금해진다. 온갖 반대를 무릅쓴 채 이룬 혼인이라니 더욱 그렇다. 그런데 시간이 약이라는 격언, 빈말이 아니었을까. 사위를 탐탁치 않아 하는 처가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고 한다. 속도는 더뎌도 평화 공존의 법칙이 온 나라가 뿌리내리길 기대해본다. 이 부부를 통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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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인터넷 참여연대(http://www.peoplepower21.org)에 게재된 글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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