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신문=김병수의 제주도사나] 아침에 이한우의 태종(상)을 읽는데, ‘일(事)이란 통기변(通其變)’이라고 한다.

‘달라짐(기변)을 통하게 한다’는 것은 상황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의미로 오늘의 뜻과도 닿는다. 이게 기본인데, 한동안 변화 ‘체인지’에만 너무 매인게 아닌가.

우도에서 생각하는 공간 재생은 1)우도 지역(장소성) 표현 / 2)이렇게 저렇게 살고 싶은 욕망의 수용 / 3)새로운 문화수요의 발견 등으로 나타난다.

1) 지역성 혹은 장소성은, 공공이 다루는 지역의 역할로 일방적 메시지는 아니다. 외려 의식의 지층을 이해하고 현재의 삶을 맥락 속에서 파악해 역할을 찾는 것이다. 공간의 지속가능성이나 공공의 역할 측면에서 매번 가치를 새롭게 해나가야 한다.

2) 욕망은 특히 제주에서 두드러진다. 장소를 찾는 사람은 유토피아적 상상을 통해 쾌감을 느끼고 싶어한다.

개인이 정체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은 항상 반대의 결과를 의식하게 된다. 외려 욕망하고 싶은 상태를 다루는 것에 공공과의 결합점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3) 한 지역 내 문화적 현상은 발견되는 자에 의해 의미망을 갖는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것도, 대상의 주체화가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문화를 받아 들이면서 조응할 계기를 새로운 문화수요의 발견으로 볼 수 있겠다.

어제 우도 나와 어머니와 이모들, 삼촌 내외를 모시고 함덕 바닷가로 갔다.

식사하고 돌아 오는 길이 겨우 버스 한 정거장이나 되는데, 손 잡은 어머니의 숨결이 고르지 않다.

아침에 책 읽고, 낮에 일하고, 저녁에 어머니와 함께 걸었다.

일로만 달리던 날들이 때로 참혹해 보인다. 앞뒤 없이 살아 온게 아닌가, 지금은 좀 나아졌나.

마음 씀씀이는 어디 가겠는가 싶게 옅은 탄식을 내뱉게 하는 오후의 바다. (2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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