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박상주 논설위원

도대체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인가, 아니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인가? 친기업·반노동의 속내를 드러내는 대통령의 발언 수위가 상식의 궤를 넘어서고 있다. 대통령의 사돈인 조석래 전경련 회장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들이 대통령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난 7일 정부과천청사 기획재정부에서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대통령은 “노동유연성 문제는 연말까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국정 최대 과제”라고 말씀하셨다. 대통령은 “과거 외환위기 때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점이 크게 아쉽다”며 “이번 세계 경제위기 속에서 노동유연성 문제를 개혁하지 못한다면 국가 경쟁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셨다.

대통령의 말씀처럼 정말로 우리나라 노동시장 유연성에 문제가 있는 걸까? 조사 기관에 따라 극과 극의 결과를 내놓고 있다. 세계은행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내 노동시장 유연성은 2005년 127위, 2006년 110위, 2007년 131로 OECD 선진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꼴찌 수준이다. 반면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2004년 자신의 저서 ‘노동시장 유연화와 비정규직 고용’을 통해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성이 OECD국가 중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정반대의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왜 이처럼 얼토당토않은 극과 극의 결과가 나왔을까. 김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김 소장은 “세계은행은 지표와 법제상의 자료를 기계적으로 투입해 순위를 산출했기 때문에 그 나라의 실제 노동계 상황과는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지는 김 소장의 설명이 줄줄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예컨대
독일의 법정근로시간은 주 48시간이고 한국은 40시간이다. 이걸 기준으로 한국인들이 독일인보다 일을 적게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속된 말로 ‘또라이’다. 독일인들은 실제로는 35시간밖에 일을 하지 않는다. 한국 노동자의 실제 노동시간은 얼마나 될까?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질문이다. 우리 노동자들은 몇 시에 출근해서 몇 시에 퇴근하는가? 아마 이명박 대통령께서도 이 정도는 잘 아실만한 문제다.

실제로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유연성 문제는 심각하다. 노동자들 스스로 ‘1회용 건전지’나 ‘1회용 티슈’로 자조하는 신조어가 생겨났을 정도다. 노동계의 주장에 따르면 이 땅의 비정규직 비율은 벌써 50%를 넘어섰다. 기업의 마구잡이 불법 해고를 비관한 노동자들의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이런 나라의 대통령이 노동 유연성 문제를 국정 최대 과제로 삼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천보만보 양보해서 노동시장의 유연성 문제를 일부 손질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손 치더라도, 먼저 선진국처럼 비정규직과 정규직간 임금격차를 줄이려는 노력과 실업자를 위한 사회안전망
청사진을 내놓는 게 국가 지도자의 올바른 도리요 마땅한 처신이 아닐까? 오히려 OECD 평균의 3분의 1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회복지 예산은 대폭 줄이면서, 노동유연성만 밀어붙인다면 거리로 밀려나는 실업자들보고 죽으라는 얘기밖에 더 되겠는가.

이제까지 이명박 대통령은 지나치게 기업 편향적이고
노조에 적대적인 내용의 발언으로 노동계의 반발을 사왔다. 심지어 악덕 기업주의 입에서조차 나오기 힘든 말까지 쏟아냈다. 지난해 말 대통령은 34개 공기업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노조와 잘 지내 임기를 채우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기관장들이 노조와 서로 잘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그 조직을 아주 방만하게 돌이킬 수 없는 조직을 만든 예가 있다”고 말했다. 노조를 때려 잡아야할 사회악쯤으로 규정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발언이었다.

대통령 당선 이전인 지난 2007년 5월 한 강연회에서는 "자부심이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라 부르고 노조를 만든다. … 서울시 오케스트라가 민주노총에 가입해 있다. 바이올린 줄이 금속이라 금속노조에 가입했느냐"고 말한 바 있다. 당시 민주노총의 성명서에 담긴 내용 그대로 “천박한 노동관”이라고 밖에는 달리 적절한 표현을 찾기 어렵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자리를 떠난 지도 이제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지금쯤은 기업인의 시야에서 벗어날 만한 때도 됐다. 온 국민을 다 보듬는 대한민국 대통령이란 큰 자리에 서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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