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IN이슈=지용진] 플라톤(Platon/abc427~bc347)은 우리가 늘상 접하는 형이상학론인 이데아론(Theory of forms)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고대 철학자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며 최초로 아카데메이아(Academeia)를 열고 철학의 공동 연구와 교육 강의를 시작했다.

국가론(Politeia)은 그의 대표 저술이다. 아테네의 시민법정에서 사형을 구형받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죽자 스승을 잃은 깊은 절망감에 휩싸인 플라톤은 “아테네의 민주정이 옳은가” “어떻게 좋은 국가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이 고민의 해답을 찾아 전 생애에 걸쳐 국가론을 써내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국가’를 그려 넣고 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개념이 바로 ‘이데아론(Theory of forms)’이다.

동굴의 입구는 빛을 향해 길게 뻗어있고 동굴 자체만큼이나 넓다. 동굴 속의 인간들은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있다.

한쪽 벽만을 바라보고 있는 동물 안 인간들은 자신이 보는 것을 진짜라고 믿는다. 그러나 플라톤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세계는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영원불멸한 본질 즉 이상세계는 동굴 밖에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를 이데아라고 했다. 이데아는 감각이 아닌 오직 이성으로만 볼 수 있다.

플라톤은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에 의문을 품고 현상 넘어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질 때 우리를 묶고 있는 사슬을 풀 수 있다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지각하고 있는 것은 실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을 국가에 대입해 본다.

우리는 “좋은 국가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플라톤은 국가를 인간의 영혼이 확대된 것으로 보았다. 이성 - 통치자 - 지혜, 기개 - 방위자 – 용기, 욕망 – 생산자- 절제다.

인간의 이성 기개 욕망으로 이뤄져 있듯 통치자 방위자 생산자로 분류해 각 계급은 자신의 직분에 맞는 덕이 있는데 지혜의 덕, 용기의 덕, 절제의 덕으로 나눈다.

여기서 덕이란 영혼의 ‘탁월한 능력’을 의미한다. 이처럼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모두가 제 역할을 하는 덕)의 ‘4주덕’에 기초한다.

각 계급이 각자의 본분에 맞는 탁월성을 발휘해 조화를 이룰 때 정의가 구현된 이상국가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플라톤은 ‘철인정치(哲人政治)’를 주장한다.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지혜의 덕을 갖춘 철학자에 의한 통치가 이뤄져야 이상국가가 된다.

더 나아가 통치자와 방위자 같이 나라를 지키고 보존하는 ‘수호자’들은 철저하게 공익을 위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사유재산 금지, 공동거주, 공동육아 등의 엄격한 규칙을 실천해 자신이 가진 욕구는 단념하고 오로지 ‘국가수호’에 전념할 것을 강조했다.

한편으론 플라톤은 ‘열린사회의 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민주정을 신봉했던 소크라테스를 배신했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정이 참주정으로 가는 독재를 연다고도 설파하고 있다. 또 이상국가에서 통치자들의 전체주의적 정치체제를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현대에 와서 쟁점이 됐거나 되고 있는 여러 문제들 공산주의를 비롯해 우생학, 여성해방론, 산아제한의 문제, 니체와 루소가 거론하고 있는 도덕의 문제, 사회계약에 관한 문제는 물론이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미치고 있다.

초기 대화편의 소크라테스는 “역사적인 소크라테스다”와 중기 대화편은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변인이다”란 말이 나오기도 한다.

국가 1권은 초기 대화편 2~10권은 중기 대화편으로 분류한다. 초기라고 추정되는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지 않는다. 경건이나 용기 등이 무엇인지에 대한 상대방의 의견을 검토한다. 검토 결과 대답을 못 찾고 끝난다.

중기 이후라고 추정되는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적극적인 주장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옹호 주장을 편다.

1권은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케팔로스 폴레마르코스 트라쉬마코스의 견해를 검토한다. 2권부터는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제시되는 특징이 있다.

국가 1권의 대화 상대자들을 분류하면 케팔로스는 부유하고 경건한 노인이며 폴레마르코스는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여러 견해를 제시하고 차례대로 논박 당하는 젊은이다.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득’이요 남에게만 좋은 것이라고 주장했다가 논박당하는 소피스트다.

국가 2~4권에 클라우콘이 세 종류의 ‘좋음’을 구별한다. 1. 그 자체 때문에만 좋은 것(해롭지 않은 즐거움), 2. 그 자체 때문에도 좋고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건강 지혜), 3. 결과 때문에만 좋은 것(신체단련 치료받기 돈벌기)이다.

클라우콘은 정의가 3번이라고 주장하고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2번이라고 주장한다. 글라우콘은 여기서 무리한 요구를 한다. 정의는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임을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고문당하고 욕먹는 정의로운 자가 칭송 받는 부정의한 자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정의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고는 클라우콘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불가능하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의 개념을 나라도 확장한다. 그리곤 ‘이상국가’를 말로 꾸며보기 시작한다.

이상국가 수립에 있어 개개인들은 ‘분업’하는 것이 효율적이며 ‘적성’에 맞는 일하기를 위해 생산자와 수호자를 구별한다.

여기서 수호자는 지혜를 사랑하며 온순한 동시에 사납고 시가와 신체단련을 한다. 이같은 수호자들 중에 통치자가 선발되며 나라의 이득이 되는 것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장 잘 수호하는 이가 통치자가 돼야 한다. 또 다양한 시험을 통해 통치자가 선발된다.

여기에 이상국가의 4주덕을 설파하는데 지혜-통치자, 용기-방위자, 절제-생산자, 정의-세 집단이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플라톤의 나라의 정의는 통치자 집단, 방위자 집단, 생산자 집단이 모두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통치를 하고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라를 지키고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생산 활동의 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은 영혼의 세부분을 나누는데 이성부분-계산하는 부분, 기개부분-화내는 부분, 욕구부분-다양한 신체적 욕구를 가지는 부분이다.

플라톤이 설파하고 있는 정의로운 사람은 이성부분, 기개부분, 욕구부분이 모두 자신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으로 이러한 상태를 만들어내고 유지시켜주는 영혼과 행동을 정의로운 행동으로 규정한다.

국가 5-7권은 여담으로 기록돼 있는데 수호자 집단은 문자 그대로 한 가족이며 여성도 수호와 통치를 공유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철학자’가 통치자가 돼야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설파한다.

오류불가능한 인지 상태를 가진 철학자가 통치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데아를 대상으로 하는 ‘앎’ 즉 다른 종류의 모든 덕을 겸비한 자인 ‘철인(哲人)’이 통치자가 돼 시민들의 대중적 덕을 만들어낸다.

철학자를 만들어내는 교육을 살피면 철학자는 가장 큰 배움에까지 도달해야 하고 가장 큰 배움은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배움이며 태양의 비유 동굴의 비유처럼 10년의 수학교육 5년의 변증술 교육 15년의 실무 수행 후에 ‘좋음’의 이데아(동굴 밖 세계)에 다다른다.

국가 8~9권은 이상국가의 몰락을 다룬다.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통치하는 명예정,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통치하는 과두정, 평등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의 민주정, 대중 선동가의 지배를 받는 참주정이다.

여기서 플라톤이 표현한 정의로운 사람의 정의에서 영혼의 각 부분은 고유한 욕구와 고유한 즐거움을 가지고 있다 말한다. 정의로운 사람은 진정한 지혜와 진정한 명예와 진정한 이득을 추구하기 때문에 영혼 각 부분의 고유한 즐거움을 최대로 누린다.

정의는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이다. 영혼이 일그러진 사람은 재물이나 권력을 가지더라도 좋은 상태(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의로운 사람은 지식과 명예와 재물의 추구에서 적절한 한도를 지킬 것이며 자신 속의 정치체제(Politeis)를 지키는 데 힘쓸 것이라 한다.

10권에선 슬픔과 욕정을 계속 곱씹어보는 것은 비이성적 부분이 영혼을 지배하게 만든다 설파한다. 비극은 비극으로 가득 차 있는 삶을 살아내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삶은 비극으로부터 배우는 삶을 살아내는 것- 견뎌내고 그것이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패배적 현실론의 극복)-이다.

영혼 불멸을 다음과 같이 증명한다. 각각의 것에 고유한 ‘좋음’과 ‘나쁨’이 있다. 고유한 나쁨은 각각의 것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고유한 나쁨이 어떤 것을 파멸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멸이다. 영혼의 고유한 나쁨인 ‘부정의’는 그것을 파멸시키지 못한다.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의 정의와 부정의가 결코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럴 법하지 않다. 알려지기만 하면 정의와 부정의의 결과는 고스란히 따라오게 된다. 최소한 신들은 모르지 않는다. 영혼이 불사이기에 다음 생이라는 것이 있다.

전반적인 플라톤의 기술에 있어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이란 비판도 있다. 이를 테면 소크라테스는 대중적이었는데 반해 플라톤은 엘리트적이란 후세 철학자들의 견해도 있다.

플라톤은 이렇게 정의로운 나라의 정의로운 사람이 진정 자유롭다 설파하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자유의 개념에 대비 플라톤을 돌아볼 수도 있겠다.

우선 민주정과 민주정의 자유를 비판하는 국가론의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주장을 인정할 수 있을까.

국가론의 소크라테스 즉 플라톤이 그리는 이상국가가 전체주의적으로 보인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변명을 할 것인가.

각자가 적성에 맞는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정의의 개념과 자유의 개념의 충돌이다.

각자가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서로간의 충돌이 있을 때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정도가 나라의 할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플라톤의 민주정 비판의 뿌리에는 무엇이 정말로 좋은지에 대한 고민 없이 단순히 그때그때 좋아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자유가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인가 질문하기도 한다.

국내 어느 철학자의 우문처럼 자유의 개념에 있어 “학교도 빼먹고 3일 연속 온라인 게임을 하는 게임폐인이 되는 자유도 우리에게 필요한가”다.

철학은 자체보다 철학하는 자세에 있다. 생각하고 비판하며 사고하는 데 있으며 이러한 반성과 비판의 정신이 플라톤의 국가론을 이끌고 있다.

위에서 플라톤이 거론했듯 영원불멸 같은 것은 없다. 진정한 이성의 힘이 불멸이라 하는 것도 이상국가와 철인정치의 정수를 대변하는 무리한 전개이기도 하다.

복잡다단한 국가 체계에서 현대인들은 살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론은 지난 2500년간 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기도 했다.

물론 필자도 국가론을 통해 많은 비유와 상징에 있어 현대 정치를 돌아보게 됐다.

특히나 참주제에 있어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른바 포퓰리즘으로 민중을 기만하고 자신들의 독재를 합리화하는 실상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를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 지표를 잃은 리더십에 있어 우리는 이들 정치세력들이 어떻게 권력을 수단화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론을 통해 여러 부분을 돌아보게 됐다. 우선 그 많은 사유의 풍성함이다. 말로써 이룬 이상국가에 대한 플라톤의 철학도 관심을 끈다.

이렇게 지난 2500년간 세계인의 애독서가 된 이유는 서구의 철학을 이끈 천재적인 플라톤의 업적에 있다.

이 책을 추천해 주신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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