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IN이슈=지용진] 국가 지도자란 어떤 존재인가. 국가의 비전과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그럴 만한 인재가 있는 가 우린 눈 씻고 찾으려 한다.

많은 예비 후보군이 있다. 시쳇말로 잠룡이라 한다. 약 1년이 남은 시점이다. 적지 않은 변수가 있으리라 본다. 넘을 산이 아직 많다는 것이다.

이들을 평가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인품과 도덕성 그리고 능력이다. 인품은 바로 통치력이다. 한 나라를 경영하고 아울러야 하는 게 국가지도자다. 이에 걸 맞는 인품이 갖춰져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 도덕적 흠결이 없어야 하는 데 동의한다. 

민주화시대의 투쟁 전력이 한때는 훈장이 됐지만 이제는 부담으로 다가서는 시대가 됐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를 위해 항거한 사람이 민주주의에 등을 돌린다면 표리부동의 전형으로 전락하는 경우를 종종 봤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변함없는 가치를 갖고 국민께 다가가고자 했냐는 의문에 충분한 대답을 해야 한다.

또 변화무쌍한 국제질서와 대내적으로 산적한 숙제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성공 가능한 수준으로 이끌 수 있느냐는 능력의 요구도 점차 커지고 있다. 

국가 지도자로 나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성공한 지도자 능력 있는 지도자로 훌륭히 국가를 경영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액면 그대로 훌륭한 정치인이자 행정의 수반으로 제 역할을 넘어 새로운 비전으로 21세기를 대한민국호를 이끌어가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가 부여되고 있다. 그래서 어렵다. 판단하건데 어느 순간 다가선 후보도 있을 것이고 관심 밖의 후보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현재 어떤 후보를 지지하느냐는 유보한 상태다. 아마 대선 코앞까지 고민할 듯싶다. 

중요시 여기는 것은 국민에게 혼란을 부추기고 폐를 끼치는 것을 엄중히 경계한다. 이는 5년 재임 내내 나라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한편 소모적 논쟁으로 점철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동안 10명의 대통령의 재임을 보았다. 어린 시절을 포함해 청년기와 중년을 지나는 지금까지다. 권력의 속성도 대충 파악하고 있다. 뚜렷한 업적과 성과의 한 획을 긋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도 안다. 그래서 국가지도자란 험난한 여정이다.

60~80년대 산업화시대에 독재 정권의 치하에서 어둔 권력의 이면도 경험했다. 정당한 권력의 행사란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할 때 신뢰 없는 정권이 과반이 넘었으니 다음 대통령에 대한 기대 또한 크다.

엄격히 권력을 높게 쌓고 주변의 권위를 세우는데 열중하고자 하는 후보는 경계해야 한다. 내용 있는 정책을 추구하는 후보를 우선할 것이다.

권력은 하나의 우상이다. 이들의 신의도 잘 포장된 스토리지만 경우에 따라 일개 조폭 집단보다 못할 때도 있다. 

또 정치인을 우상화하고 이를 국민에게 강요하는 것도 잘 못된 일이다. 그들의 숭상을 뭐라 할 수 없어도 그러한 행위가 정치를 잘 포장된 신화쯤으로 희석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를 지적하는 시사평론가 유창선님의 글을 재밌다.

사마천의 『사기』 「백이열전(伯夷列傳)」에 나온 백이와 숙제는 부끄럽게 사느니 굶어 죽기를 택한 지조와 절개의 인물로 수천 년 역사에 전해져 내려왔다. 그런데 루쉰은 『고사신편(故事新編)』에 실린 「고사리를 캔 이야기」에서 두 사람을 대단히 우스꽝스럽게 묘사했다. 루쉰이 재해석한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에서는 그들이 사슴의 젖도 모자라 아예 잡아먹으려는 탐욕을 부리다가 결국 굶어 죽은 것으로 나온다. 루쉰은 백이와 숙제에 관한 지조와 절개의 신화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정치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또 더더군다나 한 나라의 경영과 통치는 엄중한 일이다. 그래서 국가지도자는 어설픈 감성론을 경계해야 한다. 

흐리멍텅한 가치와 이념 따위로 국민의 판단을 혼란스럽게 하는 아픈 기억들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

그만큼 콘텐츠 즉 내용이 있는 실무형 지도자가 출현해야 할 시점이다. 제대로 된 국가 비전 없이는 험난한 시대를 살필 기회는 멀어진다.

마키아벨리는 지도자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지도자가 기회를 인식하고 포착할 수 있으며 상대보다 생각이 앞서게 되고 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21세기의 벽두에 몰아친 팬데믹은 국가 지도자의 결단과 추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지도자의 잘 못 된 판단이 국민 전체에 피해를 준다는 교훈이다. 

무엇보다 국가지도자는 문화대통령이 돼야 한다.

소모적 논쟁과 정쟁을 정리하고 국리민복과 향상된 삶을 누릴 문화적 토양을 구축하고 실천하는 데 애를 써야 한다. 이른바 선진국 대열에 합류 했으나 우리가 자신 있게 문화 선진국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머뭇거리게 된다.

아직 전국에 오페라하우스와 콘서트홀이 갖춰진 곳이 몇 군데 안 된다. 지자체별 사업으로 떠넘기는 경우도 있으나 예산 문제 등으로 늘 시끄러운 게 현실이고 뒷말이 무성한 수준이다. 과감한 국가적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토목과 건설에 투자되는 시대도 있었다. 또 생산설비가 증대되는 시대도 있었다. 물론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지금도 진행형이다. 4차 산업 혁명 시대를 맞아 대규모 콘텐츠 수요가 폭증하리란 전망에서 이같은 기초가 되는 문화예술의 여건 조성에 대한 투자는 필수적이라 하겠다.

더불어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사회적 예우의 증대와 이들이 먹고살며 활동할 수 있는 민간 예술 사업들을 활발히 펼칠 수 있게 과감히 규제를 철폐하고 새로운 기반 마련에도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가시적인 부분에만 치중해 전시성 사업에 그치는 사례들을 지양하고 거시적 계획을 세워 대응해야 한다. 이는 국가지도자의 명확하고 분명한 사업 계획과 비전 제시가 요구된다. 

한계는 인정하고 우선 추진해야 할 것을 확정 후 변함없는 신뢰를 보낼 수 있게 일관된 정책으로 화답해야 한다.

이제 1년 남짓 남은 대선 정국에 위의 가치를 담을지를 지켜보고 판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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