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IN이슈=지용진] ■ 모든 일은 사람이 한다

요즘 절실히 깨닫는 게 있다. 인사만사(人事萬事)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한다. 갖춰야 할 능력과 재능 이전에 모티브가 되는 인성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베이식이다. 그래야 가능을 타진할 수 있다.

사람을 잘 못 쓰면 일을 망친다. 일뿐만 아니라 조직도 망친다. 그래서 인재를 잘 등용해야 한다. 일은 더디더라도 발전의 가능성과 함께 함께 갈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언론쪽 일을 하고 있는 특성상 이러한 요소는 매우 중요하다.

누구를 비판하기 전에 충분한 도덕적 감수성과 함께 기본이 돼야 할 것에 충실해야 한다. 자칫 이것이 안 될 시 ‘오십보백보소’의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30대 등도 있었다. 문제는 인내심이 없었다는 데서 비롯됐다. 언론은 타이밍의 예술이다. 그런데 ‘감각’이 없었다. 성실하다고 다 되는 경우는 없다. 각자의 길을 가야하는 데 도달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보았다.

이직률이 높은 일터다. 그래서 변동이 많다. 정보를 따라 움직임이 가벼운 사람도 부지기수다. 옥석을 가리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타진해야 하는 것이다. 굳이 고급 인력이라고 가려야 할지도 의문이다. 단순할 수도 있는 일이다. 좋은 기사를 쓰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 과정은 험난하다.

소림사에서 수련하는 느낌으로 입문했다. 사회부 기자는 경찰서 형사들과 생활 패턴이 똑같다. 차이가 있다면 한 사람은 ‘잡는 게’ 일이고 한 사람은 이를 ‘쓰는 게’ 일일 뿐이다. 그러니 따로 쉬고 일하고가 없다. 노트북을 열면 기사를 쓰는 것이고 닫으면 취재하는 것이다.

요즘은 ‘프로 의식’을 가지고 일을 하는 이는 드물다. 어찌 보면 이 업종도 3D 업종이기 때문이다. 언론이란 허울 좋은 명예만 봤다간 큰 코 다친다. 지난 93년 입문해 올해로 28년째다. 사실 다른 일을 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다.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언론은 크게 편집국과 취재국으로 나뉜다. 취재는 각종 사건과 사안을 취재해 기사화하고 편집국은 이같은 기사를 ‘키울 것’과 ‘줄일 것’ 등 헤드라인 등을 잡고 편집을 해 지면화한다. 통상 인터넷에 내보내는 것도 넓은 범주의 지면화다.

마감날이 되면 보통 새벽을 넘기기 일쑤다. 재고 삼고 탈고까지 보려면 밤을 하얗게 샌다. 더군다나 기사다. ‘팩트 체크’가 관건이니 사실 관계가 정확해야 한다. 특정 불특정 독자들에게 신뢰받기 위한 일환이다.

지금하고 있는 신문은 15년이 넘었다. 매일같이 경기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사안 등의 일들을 기사화한다. 이런 압박감으로 15년 살다 보니 ‘섬유근육통’이란 질병도 생겼다. 어깨가 뜯기는 듯한 근육통을 달고 산다. 진통제는 아침저녁으로 먹는다.

막연히 언론일을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건 정말 큰 오산이다. 이 같이 피를 말리는 사투 속에서 좋은 기사가 나온다. 이즘 ‘기레기’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 시대다. 질 낮은 가짜 뉴스에 대한 독자의 반응이다. 이런 분들 때문에 선량하고 건강한 기자들이 싸잡아 욕먹는 시대가 됐다. 집단지성이 건강한 가치로 발현되면서 점차 옥석을 가리리라 여겨진다.

건강하고 좋은 기사란 어떤 기사일까. 보통 불편부당의 입장에서 시대정신을 담은 춘추필법에 정통해야 할 것을 권한다. 여기에 엄중한 도덕적 모럴을 실천하고 그 기준으로 시대를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분명한 판단의 가치와 기준 또 이를 뒷받침하는 양식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 할 수 있다.

■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순수한 시민의 입장

우리사회를 규정하는 판단의 몇 가지 사례를 열거하고자 한다. 어디까지나 나의 기준임을 전제로 한다.

필자의 정치적 섹터는 시민사회 섹터다. 시민사회도 양분돼 있다곤 하나 그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순수한 시민의 입장에서 해석함이다. 어느 한쪽을 편들라는 것은 이른바 정치적 파시즘 논리다. 우리의 ‘광장’은 선택의 문제지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존경하는 교수님의 강의에서 엿본 70년대부터 80년대를 아우르는 ‘호스티스 영화’를 예전부터 당시 시대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낼 수작으로 평가한 적이 있다.

어렵고 힘든 시대 우리의 이모 누이의 얘기였을 가장 밑바닥을 사는 사람들의 비루한 삶과 애환을 접할 수 있었다. 굳이 사회 구조론까지 끄집어 내지 않아도 당시 기층 민중의 노동 변천사에서 시대의 남성주의의 가장 끝에 내몰린 힘없는 여인들의 사연은 우리를 눈물겹게 한다.

경제적 번영의 그늘에서 그들은 그렇듯 어렵게 80년대의 터널을 지나쳐 갔다. 이쯤에서 굳이 호스티스 영화를 거론하는 것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의 한 극명한 ‘척도’로 제시함이다. 가장 힘없는 여성들이 생존을 위한 거친 사지의 일터에 내몰려야 했던 우리의 자화상이기에 그렇다.

여공(시다), 버스 안내양, 호스티스로 우리 사회 가장 낮은 곳에서 감내해야 했던 노동의 양식은 퇴조해 없어지고 있지만 우리사회 저변에 드리운 아픈 그림자임은 틀림없다.

최근 수원시의 갖은 노력으로 ‘수원집창촌’이 철거됐다. 수원역 앞에 조성됐던 이들 집창촌도 시대 속으로 사라지고 재개발에 들어서게 됐다. 대도시에 있는 우리시대 마지막 집창촌이 사라진다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두는 분들도 계시다. 앞서 언급했던 문제들이 아직까지 진행형이었다는 데 놀라움도 있다. 두 사례가 같다고 말하긴 힘드나 아직 많은 숙제를 떠안고 있는 건 사실이다.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사안으로 내모는 순간 우리의 민주주의도 소원하다.

우리사회 양분하는 가치가 있다. 과연 지상에 이 둘의 가치만 존재할까. 우리사회는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고 그 권리는 누려져야 한다.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됨의 추구는 다양하게 발현되고 이는 곧 생활의 양식, 문화의 양식으로 우리를 구성한다.

사회는 변화하고 있고 성숙한 단계의 민주주의를 향한다. 이같은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고 나 아닌 타자의 삶과 양식도 함께 할 수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풍토는 다원화 사회의 미덕이다. 이는 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내일의 시선이 어느 한편에 편중되지 않고 풍요로울 수 있다는 비전을 품게 한다.

80년대부터 진행됐고 90년대 말 완성됐던 우리사회 주류로 일컫는 범사회운동은 일정 부분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을 만들었다. 이같은 구세대 운동은 시대의 흐름 속에 퇴조하고 시민 속에 참여하는 이른바 신세대 운동인 시민운동도 30년을 맞는 시점이다. 시민운동을 감시하는 시민운동을 논하는 시대에 이르러 한국사회의 성숙한 문화 비전을 제시할 담론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의 저변이 넓혀지고 있다.

저명한 소설 최인훈의 ‘광장’에서 주인공은 제 3지대를 선택한다. 소설 속에서는 한 개인이 갖는 신념의 확장에서 시대의 비극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그려졌지만 우리시대 광장의 지평은 이제 당연한 ‘영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원화라는 어휘 자체도 편중된 시선이 보내는 극히 주관적 해석일 수 있다. 다원화 만능주의를 지양하면서 다양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풍토는 민주주의의 척도를 가늠할 중요한 요소다.

이 지점에서 과연 우리사회를 나눠 양립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소위 정치적 주류의 가치가 진정한 의미의 우리사회를 대변할 수 있는가에 의문을 품어본다. 지지하는 정당의 이슈 어필에 따라 출렁이는 민심의 추이와 현상은 애초 양립된 가치의 본질과도 멀어져 있다.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일컫듯 다분히 정치적 색깔론의 프레임에 갇혀 서로에게 끝없이 대치되며 비생산적 구태만 답습하고 있지 않냐는 문제 인식이다. 싸잡아 이같은 현상을 인정하지 않거나 부정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과연 바람직한 것이냐는 것이고 이 틀에서 생산적인 비전이 나올 수 있겠냐는 탄식이다. 또 이것을 주류적 현상으로 인정할 수 있냐는 문제다. 단순한 프레임에 씌운 현상이라 해석해 보고자 한다. 다만 이슈일 수는 있다. 그것이 우리사회를 해석하는 본질이라고 본다면 오산이다.

사회지도층도 반성해야 한다. 주류 정치에 줄을 대고 어떻게든 정치적 본류로 진출하고자 하는 폴리페서들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학자적 논리와 정치적 논리에 있어 이들을 구분하는 매카니즘은 애초에 다르다.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명분의 도취에 발로든 개혁적 의지의 실현이든 좋으나 정치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프레임 속에서 이뤄지는 대립과 투쟁이란 구도에 익숙할수록 본연의 의지는 약화된다. 그렇다고 이들이 우리정치를 변화하겠다는 의지는 더더욱 찾기 힘들다. 단 소망은 누구나 피력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사회 지도층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샌드위치로 브런치를 먹고 무거운 서류를 짊어지며 자전거로 의회를 출퇴근하는 유럽과 같은 이상적 정치는 둘째치고라도 자질과 책임 의식은 아직도 먼 영역이다.

이들은 당색에 따라 표리부동하다. 의회란 권좌에서 그 자리를 보존하고 다음 공천 때까지 안전한 경로를 선택한다. 당심과 멀어지지 않도록 이심전심하는 데 올바른 신념이나 이상을 표출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 인식에서 국민은 과연 이들에게 온전한 신뢰를 보낼 수 있을까.

정치적 호불호가 갈리나 여기서 이 정부의 조국 사태에 관련한 일련의 조치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국민의 인내심이 한계까지 다다른 상황에서 정부의 무대응과 무능력은 공분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신뢰는 한없이 추락하고 과잉된 권력이 남발됐다. 명분은 사라지고 권력은 욕망이란 열차를 타고 멈추지 않고 달렸다. 멈춰야 할 시점이 지났을 때 국민은 이미 신뢰를 거뒀다.

권력이 과몰입하고 본질을 망각했을 때 국민은 심판한다. 정치적 피해망상을 국민에게 각인하고자 하는 권력의 과잉에 대한 엄중한 경고라 할 수 있다. 일련의 사태 속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의 침탈이다. 국민 간 비생산적 논쟁을 제공하고 살벌한 대립을 양산했다는 건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 새로운 비전으로 21세기를 대한민국호를 이끌어가야

이제 대선이 코앞이다. 국가 지도자란 어떤 존재인가. 국가의 비전과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그럴 만한 인재가 있는 가 우린 눈 씻고 찾으려 한다.

많은 예비 후보군이 있다. 시쳇말로 잠룡이라 한다. 약 1년이 남은 시점이다. 적지 않은 변수가 있으리라 본다. 넘을 산이 아직 많다는 것이다.

이들을 평가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인품과 도덕성 그리고 능력이다. 인품은 바로 통치력이다. 한 나라를 경영하고 아울러야 하는 게 국가지도자다. 이에 걸 맞는 인품이 갖춰져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 도덕적 흠결이 없어야 하는 데 동의한다. 민주화시대의 투쟁 전력이 한때는 훈장이 됐지만 이제는 부담으로 다가서는 시대가 됐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를 위해 항거한 사람이 민주주의에 등을 돌린다면 표리부동의 전형으로 전락하는 경우를 종종 봤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변함없는 가치를 갖고 국민께 다가가고자 했냐는 의문에 충분한 대답을 해야 한다.

또 변화무쌍한 국제질서와 대내적으로 산적한 숙제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성공 가능한 수준으로 이끌 수 있느냐는 능력의 요구도 점차 커지고 있다. 국가 지도자로 나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성공한 지도자 능력 있는 지도자로 훌륭히 국가를 경영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액면 그대로 훌륭한 정치인이자 행정의 수반으로 제 역할을 넘어 새로운 비전으로 21세기를 대한민국호를 이끌어가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가 부여되고 있다.

그래서 어렵다. 판단하건데 어느 순간 다가선 후보도 있을 것이고 관심 밖의 후보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현재 어떤 후보를 지지하느냐는 유보한 상태다. 아마 대선 코앞까지 고민할 듯싶다. 중요시 여기는 것은 국민에게 혼란을 부추기고 폐를 끼치는 것을 엄중히 경계한다. 이는 5년 재임 내내 나라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한편 소모적 논쟁으로 점철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동안 10명의 대통령의 재임을 보았다. 어린 시절을 포함해 청년기와 중년을 지나는 지금까지다. 권력의 속성도 대충 파악하고 있다. 뚜렷한 업적과 성과의 한 획을 긋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도 안다. 그래서 국가지도자란 험난한 여정이다.

60~80년대 산업화시대에 독재 정권의 치하에서 어둔 권력의 이면도 경험했다. 정당한 권력의 행사란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할 때 신뢰 없는 정권이 과반이 넘었으니 다음 대통령에 대한 기대 또한 크다.

엄격히 권력을 높게 쌓고 주변의 권위를 세우는데 열중하고자 하는 후보는 경계해야 한다. 내용 있는 정책을 추구하는 후보를 우선할 것이다.

권력은 하나의 우상이다. 이들의 신의도 잘 포장된 스토리지만 경우에 따라 일개 조폭 집단보다 못할 때도 있다. 또 정치인을 우상화하고 이를 국민에게 강요하는 것도 잘 못된 일이다. 그들의 숭상을 뭐라 할 수 없어도 그러한 행위가 정치를 잘 포장된 신화쯤으로 희석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를 지적하는 시사평론가 유창선님의 글을 재밌다.

사마천의 『사기』 「백이열전(伯夷列傳)」에 나온 백이와 숙제는 부끄럽게 사느니 굶어 죽기를 택한 지조와 절개의 인물로 수천 년 역사에 전해져 내려왔다. 그런데 루쉰은 『고사신편(故事新編)』에 실린 「고사리를 캔 이야기」에서 두 사람을 대단히 우스꽝스럽게 묘사했다. 루쉰이 재해석한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에서는 그들이 사슴의 젖도 모자라 아예 잡아먹으려는 탐욕을 부리다가 결국 굶어 죽은 것으로 나온다. 루쉰은 백이와 숙제에 관한 지조와 절개의 신화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정치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또 더더군다나 한 나라의 경영과 통치는 엄중한 일이다. 그래서 국가지도자는 어설픈 감성론을 경계해야 한다. 흐리멍텅한 가치와 이념 따위로 국민의 판단을 혼란스럽게 하는 아픈 기억들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

그만큼 콘텐츠 즉 내용이 있는 실무형 지도자가 출현해야 할 시점이다. 제대로 된 국가 비전 없이는 험난한 시대를 살필 기회는 멀어진다.

마키아벨리는 지도자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지도자가 기회를 인식하고 포착할 수 있으며 상대보다 생각이 앞서게 되고 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21세기의 벽두에 몰아친 팬데믹은 국가 지도자의 결단과 추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지도자의 잘 못 된 판단이 국민 전체에 피해를 준다는 교훈이다. 국민의 건강권이 풍전등화인 시점에서 잘 해도 모자를 판에 기본도 못해서 되겠는가.

■ 4차 산업 혁명 시대를 맞아 대규모 콘텐츠 수요가 폭증

무엇보다 국가지도자는 문화대통령이 돼야 한다.

소모적 논쟁과 정쟁을 정리하고 국리민복과 향상된 삶을 누릴 문화적 토양을 구축하고 실천하는 데 애를 써야 한다. 이른바 선진국 대열에 합류 했으나 우리가 자신 있게 문화 선진국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머뭇거리게 된다.

아직 전국에 오페라하우스와 콘서트홀이 갖춰진 곳이 몇 군데 안 된다. 지자체별 사업으로 떠넘기는 경우도 있으나 예산 문제 등으로 늘 시끄러운 게 현실이고 뒷말이 무성한 수준이다. 과감한 국가적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토목과 건설에 투자되는 시대도 있었다. 또 생산설비가 증대되는 시대도 있었다. 물론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지금도 진행형이다. 4차 산업 혁명 시대를 맞아 대규모 콘텐츠 수요가 폭증하리란 전망에서 이같은 기초가 되는 문화예술의 여건 조성에 대한 투자는 필수적이라 하겠다.

더불어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사회적 예우의 증대와 이들이 먹고살며 활동할 수 있는 민간 예술 사업들을 활발히 펼칠 수 있게 과감히 규제를 철폐하고 새로운 기반 마련에도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가시적인 부분에만 치중해 전시성 사업에 그치는 사례들을 지양하고 거시적 계획을 세워 대응해야 한다. 이는 국가지도자의 명확하고 분명한 사업 계획과 비전 제시가 요구된다. 한계는 인정하고 우선 추진해야 할 것을 확정 후 변함없는 신뢰를 보낼 수 있게 일관된 정책으로 화답해야 한다.

■ 살아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운영하고 있는 매체를 통해 만평을 그린다. 소재는 자유다. 우연찮게 그리게 된 게 수백 편을 그리게 됐다.

여러 상상을 펼친다. 시사적인 부분도 그리지만 가급적 따스한 얘기들로 채우려 했다. 살아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앞서 쓴 내용들도 삶의 내용들이다.

살아가는 데 이것이 정답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게 있을까. 도식적으로 계산해 살 수는 없다. 예기치 않은 일들을 겪는 게 인생이다.

거창하지 않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한 1년 준비하면 되려나 모르겠다. 그간의 생각들을 정리하는 과정이다. 늘 새 기대를 채우지만 이제 중년의 여정은 그렇게 욕심으로 채우지는 못한다.

서울에서 30년 또 경기도서 20여년을 살고 있다. 나의 약사다. 한 지역에 적응하기도 힘든 과정이 있었다. 생활권이 다르고 지역적 특성 또한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지만 괄목할 만한 성과는 없었다. 월급을 받지 않는 자유직업인으로 15년을 살았다. 한때는 지역 최고의 연봉을 받는 언론인이었지만 지금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유지해야 한다.

뒤늦게 경영대학원을 입학했다. 많이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아직 채울 것이 많다는 겸손함을 배웠다. 새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존경하는 교수님들을 비롯 쟁쟁한 선후배 원우님들은 신선한 자극이었다. 50의 중반에 느끼는 가장 큰 자극이었다. 향수 가게에서 굳이 향수를 사지 않아도 향수 냄새가 난다. 그렇게 대학원이란 곳에 의의를 찾고 싶다.

앞서 문화대통령의 출현을 꿈꾸듯 지역에 문화의 새싹을 틔우고 싶다. 그래서 대학원을 선택하게 됐지만 꼭 이것이 최선이었다고 자족하지 않고 스스로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강의를 통해 배움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새로운 지식의 탐구는 즐거움 그 이상의 메시가 되고 신선한 자극이 되고 있다.

80년대를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나의 기억 속에 각인되는 80년대의 기억은 뇌리 속에 깊숙이 박힌 기억의 편린들로 채워졌다. 그 희망들로 20대를 보내고 30대에 이르러서야 하나씩 버리게 됐다.

그래서 온전한 서른의 내용을 채울 수 있었다. 그렇게 이십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나이도 먹었다. 경험은 나를 채웠지만 지식에 대한 욕구는 진행형이었다. 학문은 학문의 전당에서 치러야 한다는 사실은 의미 있다.

시대는 변화하고 있다. 팬데믹이 인류를 위협하고 있고 삶의 희망을 부여잡기 위한 사투는 계속되고 있다. 이것이 인류의 삶의 질을 강팍하게 하고 있으나 우리는 이미 내일을 향한 대항로를 출항한지 오래다.

많은 이들이 SNS를 통해 소통하면서 되려 더 가까워진 측면도 느낀다. 사람은 무엇보다 소통에 대한 욕구를 충족해야 한다. 다양한 채널의 소통을 열면서 가능성을 늘 타진하고 있다.

모두 같은 마음은 아니나 같은 방향을 설정하고 지향할 수 있다는 가능을 보았다. 만족할 만한 성과는 없다. 그럼에도 대학원이 인간관계의 지평을 넓히는 플랫폼임은 부정할 수 없다.

훌륭하신 교수님과의 대면 비대면 대화 속에서 내일을 살 지식의 식량을 비축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것이 최신의 학문임을 확신하면서 말이다. 또 새로운 조류와 언제든 맞이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다.

모든 건 철학과 인문의 지평에 연결돼 있다는 지혜로운 이의 말씀처럼 거대한 문화라는 범주에서 우리는 한 세대를 사는 동시대인이라는 데 동의한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더 넓게 지구촌의 100년 후를 내다보는 건 의미 없을지 모르지만 향후 10년 20년의 과제를 살피는 것은 좀 더 구체적이겠다.

■ 영상 세대의 올드키즈

어릴 적 다락방에 올라가면 여러 서적이 있었다. 한국문학전집은 내게 상상력을 펼치는 공간이었다. 삼촌이 사들였던 일본 미국 등의 소식을 전하는 잡지류로 흥미였다. 나에게 다락방은 지금 머물고 있는 70년대 좁은 한국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교신하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그림도 그리고 요철발명왕처럼 연구도 했다. 어린내지만 그게 놀이였고 내게 산 교육이었던 듯하다. 밤새 AFKN을 통해 접한 명화들도 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영상 세대의 올드키즈였던 셈이다.

요즘처럼 다양한 콘텐츠가 매일 쏟아지는 시대에 빗대면 시시한 부분으로 여겨졌겠지만 당시만 해도 ‘전설의 고향’에 구미호가 특수 분장을 하고 나오는 장면을 1년 내내 재밋거리로 얘기하던 때다.

많은 콘텐츠가 쏟아지고 있으나 정작 볼 만한 느낄 만한 메시지가 있는 영상 콘텐츠는 손으로 꼽는다. 과연 우리는 내일을 어떤 내용으로 채워야 하는가란 화두는 늘 고민이다.

■ 냉정하고 드라이한 시각이 필요

두서없이 써내려갔지만 적지 않은 내용을 언급했다. 비전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나와야 하고 구체적인 문화 정책들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우리는 늘 정치에 속고 또 넘어간다. 이 정도면 ‘사기’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생산적인 일에 몰두해 본질을 놓친다. 정치를 하는 쪽이나 이를 맹신하는 쪽이나 둘 다다.

이제 정신 차리고 제대로 봐야 하지 않을까. 앞서 루쉰이나 마키아벨리를 언급했지만 냉정하고 드라이한 시각이 필요하다.

프롤로그를 써내려가는 지금 생각나는 것은 휴식할 수 있는 인간상이다. 더 자세히 무엇을 즐기며 휴식할까라는 데 있다. 일터의 문화도 변화가 요구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휴식하며 행복감을 추구한다.

우리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이를 실천케 하는 국가의 안목은 삶의 질과 맞닿았다. 그래서 다른 생각을 갖는 이들에게 더 많은 발언권과 기회를 줘야 한다.

틀에 박힌 사고로 이를 이루기란 계란에 바위치기란 그간의 선험적 결론이다. 유연한 사고가 우리사회에 자리잡길 바란다. 독특한 것도 놓치지 않는 실험 정신도 필요하다. 새 틀을 짜는 과정의 일환으로 투자의 장기적 포용이라 여긴다면 좋겠다.

앞서 다원화 사회의 새 가치를 열자는 얘기를 했는데 서로 다른 생활의 양식을 인정하고 긍정적 요소를 도출할 때 그 사회의 내용은 더 풍요로워진다.

인문과 철학은 문명의 소산이다. 한 시대를 살며 어떤 권력이든 집단이든 일방적 전횡은 성공할 수 없다는 데 다다른다.

적지 않은 내용을 언급했지만 아직도 쓸 말이 많다. 이것을 옮기려면 책 한 권은 써야 가능할 듯싶다.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제안하셨듯 책을 내보는 것도 괜찮겠다.

지면을 통해 또 뵙길 희망하면서 말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2021년 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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