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신문=김병수의 제주도사나] 일본의 번역은 우리 지식체계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줬다. 주말엔 일본 관련 신뢰할만한 번역을 해온 ‘이산’출판사의 책을, 내가 좋아하는 세화의 인문책방 ‘제주풀무질’에서 구입해 읽었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대담을 옮긴 <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번역문화의 도래(근대의 이해)/ 무엇을 어떻게 번역했나(역사적 시각)/ 만국공법(법체계와 근대국가) 등으로 구성되었다.

한중일 삼국이 근대 서구의 문물을 접하면서 처음 취한 방식은, 양이와 쇄국이었으나, 결과적으로 큰 차이를 가져왔다.

 

두 번의 아편전쟁을 겪었음에도 중국은 중화사상을 고집했다가 서구 열강에 조차지역을 내주고 결국 식민지의 길을 갔다.

일본은 존왕양이의 본진이던 사쓰마번 조슈번이 침략 당하면서(운이 좋았던 패배였다만) 가장 먼저 ‘전향’을 통한 개국으로 나아갔다.

일본의 근대는 개항에 가장 적대적이던 사쓰마, 조슈 출신들에 의해 진행되는데 패배 후 적국 유학이라는 체제(근대로의 전향)가 작동된 까닭이다. 결국 기존 질서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존왕에서 개국으로 모순 없이 이동한 것아닌가.

아쉽게도 한국은 아편전쟁 이후에도 국제정세에 어두웠고(사실 선교사 등의 활동으로 나쁜 정보 환경은 아니었다만), 60년 세도정치의 폐해로 왕정복구에 여념 없었던 까닭에 소중화(모화) 사상에 빠져 있었던게 아닐까 싶다.

 

물론 프랑스의 침략(병인양요)의 성격도 일본에서의 페리 사건과는 다르게 전개 되었지.

저자들의 견해처럼 일본이 운이 좋았다는 시각에서 한중일 삼국의 처지를 비교할 수도 있다.

직격 당한 중국과 달리 / 조금 늦춰진 채 개항기를 맞이한 일본의 운도 작용했을 것이다. 곁에는 무능하고 느려터진 조선도 있었으니 거슬릴것도 없었다.

또 하나 일본의 유교전통이 중국과 달랐다는 해석이다. 중국이 영원한(윤리적) 진리(경전)에 매달렸던 반면 이를 수입 했던 일본의 입장에선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자연스레 실증주의적 태도가 배양되었다는 점이다.

아무튼 ... 짧게 정리하려 했는데 ... 시작만 하고 실패했다만, 규범적 세계를 쫒다 인과론적 세계 로 진입하는게 변방성의 인식론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든다. 재밌게 읽었다. (2020.11.30)

 

* 글 • 사진 : 김병수 제주시청 문화도시센터장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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