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IN이슈=지용진] 인간은 오감의 존재다. 체온을 나누는 대면이 제약되는 가을 이즘은 냉랭하다 못한 허탈함이다. 

여러 기관 단체 등을 입장할 때 체온을 잰다. 36.5도라는 인간의 체온이 가지는 고귀함은 정작 대면이 기피되는 현실에서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큐알코드로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 “나 살아 있다”라는 외침 같은 부피로 다가선다. “나 여기 있소”로 대변될 수도 있다.

우리 일상의 대소사인 결혼식 상가집 등 경조사의 방문도 자제되는 현실이고 보면 나와 내 주변은 고사하고 부모형제의 무사함을 위안 삼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게 재편되고 있다. 사회는 급속히 비대면 사회로 진행되고 있다. 각종 공연 행사 등도 SNS를 활용한 비대면 공연을 선뵈고 있다.

 

학원도 마찬가지다. 상당 부분 진행되고 있고 코로나가 다시 급상승할 시 언제든 언택트 수업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 놓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대규모 공연과 스포츠 관람이 한시적으로 허용되고 있으나 코로나 사태의 추이에 따라 비대면 관람으로 급속 전환된다.

다시 서두의 주제로 돌아가 사람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지 못하는 실정의 이 시대 휴머니티란 어떤 의미일까 묻는다.

우리의 일상이 재편되고 새롭게 세팅된 세상이란 상상할 만큼 익숙할 것인가?

물론 우리는 SNS를 통해 얼마든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볼 수도 음성을 들을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지지만 우리의 일상을 지배했던 대면 사회의 정감과 소통의 교감은 당분간 유예가 불가피하다. 내 뜻과 별개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코로나 사태가 바꿔놓은 일상은 아직 혼랍스럽다.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우리의 기대는 과연 성취될 수 있을까.

기대를 품는다고 하지만 확증은 할 수 없다. 그래서 안타까움이 인다. 나만의 안타까움이 아니기에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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